예술을 하고 싶으면 예술을 봐야 한다
《빨간 머리 앤》을 읽으며 그녀도 나와 비슷한 감수성을 지녔다는 것에 공감이 되었다. 위로도 되었던 것 같다. 실제로 앤처럼 엄청난 상상력을 가지고 지낼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많은 면에서 다른 만큼 비슷한 성향을 가진 것이 더 잘 보였던 것 같다. 그래서 더 흥미롭게 시리즈를 접할 수 있었다.
예전에 작은 일을 하다 만난 선배 한 분이 있다. 2달 동안 뵈었는데 그전까지는 말 한마디 하지 않는 사이였다. 사실 같은 일을 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이름도 정확히 잘 몰랐다. 연말 회식 자리에서 통성명하고 '저 선배가 ~셨구나'하는 정도였다. 그런데 고깃집에서 우연히 옆자리에 앉게 되어 선배가 내게 말을 붙여 주셨다. 그 전에도 한 번쯤 대화해 보고 싶었던 분이기도 하고 굉장히 열심히 사는 분이라는 것을 전해 들어서 즐겁게 대화에 참여했다. 그런데 나이도 다르고 경험도 다르다 보니 할 이야기가 많이 없었다. 처음 이야기하는 사람과 접점을 찾는 것은 역시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어색한 시간이 흐르다 대화 주제는 어느새 영화가 되었다. 나는 평소에도 워낙 영화를 많이 보니 할 이야기가 없으면 영화 이야기를 꺼내곤 한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에 대해 관심이 없거나 서로 취향이 다른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말이다. 그래도 영화 이야기를 어떻게든 이어가다 보면 다른 사람들에게 한 편 정도는 추천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상대방이 그 한 편에 대한 관심을 보이면 대화의 물꼬가 트이는 것이고.
그 선배와도 마찬가지였다. 다짜고짜 영화 이야기를 하니 처음부터 둘 모두 본 작품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인생영화가 무엇인지 이야기해 보았고 선배에게 넷플릭스를 통해 가장 최근에 다시 본 영화《노팅힐》을 추천해 주었다. 워낙 유명한 작품이니 선배도 당연히 알 것이라 생각했고 예상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거리에서 아무나 잡고 물어봐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 만큼《노팅힐》이 워낙 명작이지 않은가. 시간이 꽤 흘렀음에도 아직도 회자되는 것을 보면 정말 많은 사람들의 인생영화임이 틀림없다.
그렇게 《노팅힐》부터 해서 몇 작품 이야기하고 밥을 먹으려 했는데 다음 작품에 대해 이야기할 때부터 굉장히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선배와 내가 이야기하는 작품이 거의 다 겹친 것이다. 그전까지 나는 나만큼 영화를 많이 보고 좋아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다들 밖에 나가서 노는 것을 더 좋아하는 지인들이었기에 영화 이야기를 해도 5분을 채 이어가기 어려웠다. 그런데 그 선배는 나보다 2배는 더 많이 영화를 본 사람이었다. 그 사실이 굉장히 신기했고 급속도로 흥미가 생겼다. 역시 영화 애호가와의 만남은 언제나 즐겁다.
꽤 오랜 시간 동안 영화 이야기를 주고받은 것 같다. 맛있는 숯불고기도 앞에 두고 이야기할 정도였으니. 《비긴 어게인》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고 《미드나잇 인 파리》, 《어바웃 타임》, 《월플라워》등 다양한 영화에 대해 수다를 떨었다. 유명한 영화들이기도 했지만 세상에 흥행한 영화들이 아주 많다는 것을 고려하면 말하는 작품마다 겹치는 것은 대단한 우연이었다. "이 영화 봤어?"하고 누군가 물으면 "당연히 봤지! 이건?" 하는 식의 대화를 주고받다 보니 옆 자리에 앉은 선배들도 흥미롭게 이 토크를 지켜보았다.
이렇게 많은 영화들에 대해 이야기하며 느낀 것은 선배와 내가 가진 감성이 같다는 점이었다. 거의 비슷한 취향을 가지고 있었고 이야기를 나누었던 대부분의 영화들도 플롯은 다르지만 비슷한 주제와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 처음 겪는 일이어서 매우 신기했던 기억이 난다.
예술적 감성을 채우는 방법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두 단계라 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 같다. 첫째는 예술 작품을 보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꼭 거창한 작가나 화가의 작품이 아니더라도 주변에서 접할 수 있는 것들도 된다. 지하철 스크린도어에 있는 시민 공모 당선작 시들도, 거리를 지나가다 우연히 볼 수 있는 벽화도, 야외 전철역에서 차를 기다리며 볼 수 있는 사진전 작품들도 모두 예술 작품이다. 물론 집에서 편안히 볼 수 있는 영화도 그렇고.
그렇게 보면 작품을 만든 사람이 아니라 2차적으로 향유하는 사람으로서 자신만의 느낌, 감성을 가지게 된다. 그것이 원작자가 생각했던 것과 같을 수도, 다를 수도 있다. 어찌 되었든 자신이 그 예술 작품을 새롭게 받아들이는데 이것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면 더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다. 그것이 두 번째 단계이다. 본인이 느꼈던 것보다 더 많은 것들을 느낀 사람과 함께 이야기한다면 같은 작품을 보는 시각이 넓어질 것이고, 아까 나와 선배의 대화처럼 비슷한 취향을 공유한다면 '감성'도 비슷한 결을 가질 수 있구나 하는 것에 놀라움을 느낄 것이다.
그렇게 일상 속에서도 편안히 예술적 감성을 채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선배와의 대화 이후 그 분과 나누었던 '감성'을 글로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로 적으면 어떤 형태가 될지 몹시 궁금했다. 비슷한 생각을 가진 다른 사람들이 또 있을지, 같은 작품을 보고도 누군가는 어떤 다른 생각을 할지 흥미가 생겼다. 글로 적는 것만으로도 생각을 정리하고 기억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말에 본격적으로 펜을 들었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 여기까지 이어졌다. 처음 '작가'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이미지 출처: 픽사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