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본 소설이 이끈 방향
어렸을 때 판타지 소설을 아주 많이 읽었다. 워낙에 소설책만 읽다 보니 도서관 사서 선생님께서도 아실 정도였다. 한 번은 반에서 독서왕 뽑기를 했는데 책 한 권을 읽으면 스티커 하나를 받았다. 한 달에 한 번마다 새로 독서왕을 한 명씩 뽑았는데 스티커가 많이 모이면 독서왕으로 선발되고 원하는 선물을 받을 수 있었다. 그 당시에 꼭 받고 싶은 색연필 세트가 있었기 때문에 열심히 책을 읽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나의 도전에는 한 명의 라이벌이 있었다. 그 아이는 TV가 없어서 하루 종일 책만 읽는 친구였다. TV가 원래 있었는데 책을 읽는 것이 더 좋다는 부모님 말씀으로 거실 한 벽면을 온통 책장으로 채웠다 했다. 듣고 굉장히 놀랐고 참 현명한 친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 반해 나는 어렸을 때부터 드라마를 좋아했기 때문에 차마 TV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차라리 색연필을 포기하고 말지. 그런데도 독서왕에 대한 오기가 생겨서 쉴 때는 틈틈이 책을 읽었다. 그것이 다 소설책이었던 것이다.
독서왕의 목적은 다양한 책을 많이 읽는 것이었기 때문에 담임 선생님께서 보다 못해 나에게 과학책 한 권을 꼭 읽어오라는 숙제를 내주셨다. 순간 어깨가 무거워졌다. 과학을 좋아하기는 했지만 과학책은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려운 책을 읽고 싶지 않았고 나는 여전히 판타지 소설이 너무 좋았다. 판타지 소설에 대해 물어보는 친구가 있으면 당시 유행하던 책들을 장르별로 추천할 수 있을 정도로 나름 전문가였는데 말이다. 그런데도 독서왕에 도전도 안 해 보고 포기하기는 싫어서 나름 가장 쉬울 것 같은 과학책을 골랐다. 그리고 읽다 보니 과학책이 생각보다 훨씬 재미있다는 것을 느꼈다.
책을 다 읽고 독후감을 써낸 날 선생님께서 책을 쓱 보더니 퀴즈를 내셨다. 복불복으로 한 페이지를 펼쳐 나오는 내용에 대해 질문하셨는데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 달 독후감은 그 친구였다. 사실 대답을 어느 정도는 했던 것 같은데 책을 꼼꼼히 읽지 않아서 완벽한 답은 아니었나 보다. 그런데 후회되지는 않았다. 색연필이야 한 달 더 책을 읽어서 받으면 되고 무엇보다 나에게는 소설이 훨씬 더 많은 영향을 주었으니까.
그때 그렇게 판타지 소설을 많이 읽지 않았더라면 나는 작가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때 읽은 책들을 통해 어떻게 글의 플롯이 이어지고 얼마나 상상력이 발휘되어야 하는지 느꼈기 때문이다. 나름 여러 가지 사례를 통해 배우다 보니 직접 판타지 소설을 쓰고 싶어 졌다. 그래서 친구 한 명과 함께 힘을 모아 판타지 소설을 써 나갔다. 우선 그 과정은 매우 어려웠다. 그전에 읽었던 책들의 작가 분들이 참 대단한 분들이라는 것을 마음으로 느꼈다. 판타지 소설은 창의력을 발휘해서 나름의 새로운 세계를 써 내려가면 될 줄로만 알았는데 애초에 판타지적 요소를 잘 구상하는 것 자체가 어려웠다. 그저 공상을 글로 옮기면 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방학 내내, 거의 1년가량 아이디어를 모으고 회의를 하는 과정이 반복되었다. 전체적인 플롯을 짜고 그 안에서 세부적인 이벤트들을 결정하는데 정말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리고 공간, 배경, 사건을 모두 쓰다 보니 첫 기획보다 훨씬 많은 주인공들이 필요해졌고 그들의 이름을 다 짓는 데 또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런데도 그 모든 과정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시간이 아주 오래 흘렀지만 지금까지 가장 중요한 경험 중에 하나이니 말이다. 그 원고를 출판하지는 못했지만 긴 판타지 소설을 온전히 써 본 경험은 아주 값졌고 쉽게 해 볼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생각한다. 평범하게 살아왔지만 그 소설 창작만큼은 평범하지 않았다 말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렇게 어릴 적 본 소설이 나를 글쓰기로 이끌었고 처음으로 '~지음'이라는 문구를 직접 쓴 책 표지에 박아 넣었을 때 그 희열을 잊을 수 없다. 인생 처음으로 '작가'가 된 것이다. 그 원고는 집에 소장하기 위해 나름 독립 출판물 제작을 통해 어엿한 책의 형태로 만들었는데 아쉬움과 땀, 세월의 흔적이 남아 있다. 나름 작가입니다, 하고 자기 소개할 수 있는 것은 그 책 덕분이다.
글쓰기는 많은 사람들에게도 그렇듯이 나의 생각을 적어 기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고 글을 쓰다 보면 내가 중요시하는 것이 무엇인지 더 잘 드러났다. 나도 몰랐던 내 기분을 알게 되기도 하고 쓰고 싶었던 것을 구상하다 막상 글을 써보면 새로운 감정과 생각들이 써져 놀라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글쓰기는 내가 가진 예민함을 가장 잘 발휘할 수 있는 길이었다.
*픽사베이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