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와일드'
우리가 길 위에 서게 될 때는 언제 일까.
걷고 있는 많은 사람들은 말한다.
걷는 동안에 잡생각이 없어진다, 혹은 생각이 많아진다 라고.
나의 경우엔 후자인 편인데, 스스로를 괴롭혔던 갖가지 생각들이 ' 자 이제부터 한번 따져 보자 ' 하고 머리에서
길 위로 열을 지어 놓이게 되는 편이었다.
그리고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생각을 주워 따져 곱씹게 된다.
이렇게 했었어야 했나, 그게 가능했을까, 내가 옳았던 걸까, 지금의 결과가 내가 거쳐온 행동들의 결과인가 같은 많은 가정형들.
그래서 길을 걷는 셰릴(리즈 위더스푼)의 수많은 자문들이 이해가 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녀처럼 자신의 키 만한 무거운 짐짝을 메고, 하늘 아래 거름 없이 뜨거운 볕을 이거나, 추위를 견디며 4285km를 걸을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만한 대장정의 여행을 결심했을 적의 그녀 삶은 그만큼 큰 계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녀와 비할 적에 그만큼 큰 계기를 마음먹을 필요가 없는 지금의 삶을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행복한 편이라고 해야 하나 모르겠다.
사람은 자기가 겪어온 만큼만, 견딜 수 있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셰릴을 처음부터 길 위에 던져둔 채로 영화는 시작한다.
그리고 셰릴이 걷는 동안 그녀의 과거와 상처, 부정들에 대해 교차시키며 줄거리를 이어간다.
그녀가 숨을 헐떡거리고, 발톱이 빠지는 등 모든 신체적 고통들에 괴로워 할 때쯤,
지나온 과거의 단상들은 짤막 짤막하게 전해오며 어설픈 이해를 금기시켰다.
아무도 알 수 없는 것이다.
내가 지금 이 일들을 하고 행하고 있음에, 그럴만한 마땅한 이유가 규정되어진 것도 아니고,
또 답을 찾게 될 것이란 보장도 없다.
그럼에도, 걷기를 멈추지 않는 셰릴을 위해 여행자들은 응원을 보내주기도 하고, 힘이 되어주기도 한다.
그 반가운 친절에도 여행자들과 섞이지 않고 '홀로 ' 끝까지 해낼 수 있는 고독과 인내를 스스로 지켜가며 길을
걷는다.
언제든 그만둘 수 있다 라고 쉼 없이 말하지만,
그만 두지 않았다.
사랑이 많은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셰릴은.
아버지는 난폭하고 폭력적이었지만, 어머니는 셰릴과 그 동생을 아끼고 보듬어 주었다.
셰릴의 세계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한 어머니의 이른 죽음은 그녀를 무섭게도 망가뜨렸다.
자신을 원하는 많은 남자들과 잠자리를 가지고, 마약을 하고, 결혼생활도 지켜내지 못했다.
이 부분에서 나 역시도 엄마와 유대관계가 꽤 깊은 편이라고 생각하는데, 만약 엄마의 부재가 나도 그녀처럼 처참히 힘들어지게 되는 것일까 무섭고 두려워졌다.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원치 않은 생각에서 오는 만약이라는 가정은 한끝도 예측하기 어려웠다.
길을 걸으며 그녀는 과거를 회상했고, 그 기억 속에 자신을 늘 믿어주고 지지해주었던, 엄마와 그 엄마의 삶의 방식들을 생각했다.
엄마가 사랑해주었던 딸의 모습으로 돌아가기 위해 긴 시간이 걸렸다는 마지막 쯤의 대사가 가슴을 쿡 찔렀다.
그녀가 그 길에서 영화에서 나온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쉼 없이 울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사랑하는 사람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것 만큼 나 자신에게 화가 나고, 슬펐던 적이 없었으니까 말이다.
내가 엄마의 기대라는 그늘을 벗어나기까지 역시 오랜 시간이 걸렸다.
셰릴은 돌아올 수 없는 엄마였지만, 나의 엄마는 나를 위해 스스로 우산을 거두어 주었다.
엄마의 노력들과 속상한 체념을 알고 있다.
항상 미안했었던 탓인지 무던해져 버린 감정들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누군가의 자아로 귀속되어 버리는 것은 좋지 않지만, 셰릴과 같이 많은 방황에 놓여 있었더라면,
나다움을 찾기 위한 방법은 사랑의 손길 안에 자랐던 시절부터 다시 생각해 보는 것일 수도 있다.
그 아득하고 고된 과정을 몸과 함께 거슬러 올라온 그녀의 여정에 뜨거운 박수를 보내고 싶다.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고, 길 위에 새길 다짐을 오늘도 주머니에 하나 더 쌓아 놓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