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방

by 사막물고기

친구가 근무하는 병원에 Y가 진료를 왔다고 했다.

토요일에도 예약이 되어 있었고 아는 척을 해본다고 하여 친구를 기억하면 나도 자연스레 떠올리게 될 테니까 그렇게 해봐 달라고 했다.

이제는 10년이 넘어간 일이지만 친구와 그 남자 친구 차에 함께 끼어서 Y와 난 세계 관광지가 작게 축소되어 있는 곳으로 놀러 갔었다.

한참 싸이월드 감성에 빠져, 잘 쓰지도 않는 수동 카메라를 개멋에 걸고 다녔었고 초점도 잘 맞지 않는데도 열심히 사진을 찍어댔었다.

그러고 보면 Y이후의 남자 친구와는 함께 사진을 찍지도, 찍어주지도, 찍히지도 않았다.

막연하게 내 남자 친구는 사진을 찍는 취미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은연중의 떼를 받아주고 장단을 맞춰줬던 건 그래도 Y이지 않았나 싶다.

마지막 헤어짐의 대가로 미놀타 카메라를 돌려주지 않은 채 잠수를 탔던 게 Y의 문제였지만 몇 년이 지난 후 우리는 한번 재회를 했고,

‘그래도 조금은 날 그리워하거나 순수하게 사랑하지 않았을까?’하는 일말의 잔여 감정을 후련하게 정리할 기회도 있었다.

갑자기 잠수를 탄 남자 친구 집 앞에 찾아가 하염없이 기다리고, 너 말고 다른 여자를 만나고 다닌다는 항간의 소문도 인정하지 않았고, 후회 없이 매달려 보겠다고 밥풀만큼 붙어있던 자존심도 도려낸 지 오래였어도 제 멋대로 각색한 기억은 후련하게 나쁜 놈으로 밀어내고 싶지 않았던 자질구레한 감정들이 남아있었다.

다행스럽게도 다시 만났을 때 예전에도 지금에도 나에 대한 순수함은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너무너무 속이 후련했다.

이까짓 걸 깨우치는데 8년이 걸렸다는 게 어이가 없고 내눈에 형편없어 보이는 Y의 행색에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토요일에 친구가 만난 Y는 여자 친구와 함께였다고 했다.

병원까지 함께 올 여자 친구면 꽤 깊은 사이가 아닐까 싶지만 이제는 그러거나, 말거나, 내 손을 떠난 인연에 더 이상 마음 쓰지 말자고 다짐한다.

그도 행복해질 권리가 있겠다.

누구든 한 사람과의 세계가 저물면 다른 사람이 속한 세계에서 빛을 따라가는 건 당연하니까.

나 또한 그랬으면 좋겠다.

이마가 뜨끈하고 시큰하게 빛을 따라가고 싶다.


artcube-36136496_507856099630884_174698907161329664_n.jpg 작가: Nicokok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조용한 산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