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기준
우스개 소리라지만 결코 흘려듣지 못하는 진리의 말이 있다.
또라이 보존의 법칙.
예제로 생활 속 대화에 인용해 본다면
1. 안하무인 한 행동에 기가 질려 도망쳐 왔더니 더한 놈이 나타나더라
2.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의 사람이라 이해하려는 마음 자체를 버렸는데 그 체념의 순간도 아까워지는 이가 나타나더라 등등등이 있겠다.
사람이 어떻게 또라이일수가 있나!!!
우리는 말과 지적 언어를 추구하는 고등생명체인데,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고 싶고 실은 노력이라고까지 말하긴 뭣하더라도 오늘보다 나은 내일의 자신의 돼보자는 꿈이라도 꾸고 사는 것이 사람이다.
그래서 생각 없이 갖다 붙여지는 단어로 명명하기 싫다.
드라마나 영화에 나올 법한 순도 100%의 악의적인 계획을 가지고 해하려는 사람은 다행히도, 만나본 적이 없다. 그렇다는 건 대체로 선한 사람들의 인연이 찾아와 주고 있다는 축복일지 모르겠다.
감사한 일이다.
이미 끊어진 인연의 사람도, 데면데면해진 사람도, 조금 더 가깝게 지냈으면 싶은 사람도 실은 그들의 내면에서 나에 대한 좋고 싫음이 분명하였겠지만 대부분은 기본 예의 규범에 맞추어진 대접은 받았던 것 같다.
(물론 아니었던 사람과 상황도 있다.)
그에 반해 난 필요 이상으로 속마음을 말과 얼굴에 담았던 적이 있어, 아 상처를 주었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부끄러워진다.
늘 노력한다고 나 자신은 믿어 의심치 않고 백분 노력하는 중임을 사전 정보 제공지처럼 알려주고 싶지만 알 필요가 없다는 게 이치에 맞는 일이겠다.
과연 누가, 어떤 사람이, 또라이가 되는가.
갈등과 고비의 순간들을 대화로 풀어가고 싶고 대화가 되는 사람은 사람이기 때문에 저급 단어로 욕되게 하여 죄를 짓고 싶지 않다.
그럼에도 죄를 짓고 죄책감에 시달리는 어리석은 짓을 반복하고 있다.
한 사람에 대한 사소한 불만을 말한다는 게 하나, 둘, 툭툭 터져 나오다 보면 짧은 시간 집약된 사건들로 서너 개만 꺼내놓아도 다시는 상종 못할 사람처럼 되어 있기도 한다.
당사자인 나는 사과 한 입만큼 깎여나간 마음을 내보이고 싶었을 뿐인데, 위로를 해주려는 사람의 과한 편들기로 온 몸의 껍질이 벗겨진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존경하는 나의 또라이에게 느끼는 애증을 수려한 말로 구구절절 표현한다고 하여 그 누가 딱 그만큼의 적당함을 헤아리오, 끊어줄 수 있을까.
함께 난도질하듯 비난해 달라는 게 아니다.
근본 없는 성선설이나 회피로 상황을 좋게만 마무리 지으려는 건 안 하느니만 못하다.
그 양분의 감정은 나의 사랑스러운 또라이들에게 매 분, 매 시간 혼자서 고민하는 것으로도 차고 넘친다.
배울 점이 많고 따뜻한 마음을 가진 어른이라고 느꼈었다.
근간의 행동들은 동료애도 인류애도 저 먼 달나라로 던져 버리고 온 우주인 마냥 자기 안위만이 머릿속에 지배되어 있는 것 같아 실망했다.
하지만 우주인에게는 너 따위가 뭔데 실망을 하네, 마네, 내 속을 알지도 못하는 하등 생물이라며 나를 또라이로 생각할지 모른다.
관계는 양방 상호성에서 이어지고 내가 누군가를 어렵게 느끼는 만큼 나도 그에게 어려움을 주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아니 될 것이다.
또라이가 곳곳의 집단에 출몰하는 건 사람은 으레 그런 것이라고 수용하지 못하는 내 마음의 또 다른 얼룩이자 자아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