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의 개인적인 기록을 읽고 나면 객관성을 띠고 독자의 몫으로 당신의 경우를 생각해보라며 넘겨주는 글 보다 더 높은 감정이입이 된다.
'나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는데, 우리 엄마도 그랬었는데'로 시작한 공감은 나의 사건과 추억을 상세하게 회상할 수 있도록 힘을 보태준다.
이슬아 작가가 살아온 이야기자, 그녀의 어머니 복희를 보여주는 글이다.
어떤 것부터 책을 읽고 난 소감으로 물고를 틔워야 할지 모르겠는데 우선은 20대인 그녀의 나이가 부럽다.
자연순환에 역행하는 칭찬이자 부러움은 가능하면 하지 말자는 주의지만 그래도 나이를 꼬집고 싶은 건 그녀의 글에서 영민하고 침착한 '젊은'냄새가 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독특하고 개성 있는 문체임을 알 것 같았고 알은체 하고 싶었다.
짧게 끊어지는 문장으로 더도 덜도 말고 말하고 싶은 딱 그만큼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복희 엄마 이야기가 나오면 읽는 걸 멈추고 자주 나의 엄마를 생각했다.
나는 우리 엄마의 역사를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나 정도면 말 잘 듣는 편이라며 덮어놓고 그렇게 알고 계시라 으름장을 놓는 건 아닌지 궁금해졌다.
엄마에게 어떤 딸이 되어야지, 노력해야지, 왜 나의 노력은 알아주지 않지? 서운해 등등등
아직까지도 엄마를 향해 손을 뻗치는 형태로만 생각한다는 게 뜨끔했다.
슬아 작가는 복희 엄마를 자신이 된 시점으로 그리고 글로 쓰면서 정말 엄마가 돼보자고 생각했던 걸까?
복희 엄마가 운전 연수를 받는 그림이 있었다.
내가 면허를 따고 운전을 했을 땐 엄마는 이미 너무도 능숙한 상태라 늘 나의 실수를 꼬집고 타박했다.
옆에 엄마를 태우고 운전을 하면 쭈그리가 된 듯 주눅이 들고 감시받는 것 같은데 복희 엄마의 에피소드 덕에 철물점 공구들을 때려 박았던 초보 드라이버의 엄마가 생각나 오랜만에 놀려주었다.
복희 엄마가 눈물을 보인 날엔 우리 엄마의 눈물을 따라갔다.
지금은 엄마가 언제 울었던가 가물가물하지만 엄마가 내 나이였을 땐 나도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라
꽤 많이, 자주, 통곡을 하며 울었던 게 생각나 코 끝이 시큰했다.
그땐 언제 울음을 그칠까 그만했으면 좋겠다고 눈치만 살폈었는데 아무에게도 위로받지 못했을 내 나이의 엄마가 가여워 훌쩍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딸은 엄마의 나이테를 따라가다 '아 이쯤이 내 나이었겠구나'하며 '나'를 놓고 짚어갈 때 겨우 이해하려 드는 것이다.
아, 뻔뻔하다.
유독 함께 읽고 싶은 딸들이 많이 생각나는 밤이었다.
슬아 작가와 같은 일을 하는 딸 한 명
우리 엄마가요가 입에 붙은 나와 비슷한 딸 한 명
엄마가 아직도 어려운 딸 한 명
함께 나와 우리의 엄마의 기억을 나누는 시간을 그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