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타인들 영화를 보았다.
영화는 시종일관 장소의 변화도, 인물의 성격이나 극적인 갈등 구조 없이도 한자리에 삐대며 이야기가 만들어지는데 사람들의 은밀한 정수를 건드리는 사생활을 소재 삼고 있어서 지루할 틈은 없었다.
그 와중에 뜬금 없었던 연출은 조진웅 김지수의 딸에게 있어 보이려는 어른의 모습을 작위적으로 연출한 듯한 대사와 상황이 오글거렸고 이서진과 송하윤의 애정표현이 어색해 보였다는 점?
예전에는 결혼을 했다면 무조건 상대방에게 충실하여야 하고 개인의 유희나 오락보다는 함께 노력하며 맞춰나가는 공공의 삶에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바람을 피워도 나 모르게 피면 된다는 입장은 동의할 수 없었다.
관계의 본질에서 비겁하게 등을 돌린 선택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근래의 각자의 사생활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부딪치는 커플들을 보며, 그렇게 갈라 선 뒤 엄마 아빠의 부재를 느껴야 하는 아이들을 보며 상대방을 어디까지 알고 싶은지 선택하는 것도 존중 받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바뀌게 되었다.
제일 이상적인 것은 각자의 견고한 양심과 도덕 위에 올려진 사랑으로 진실되게 상대를 대하고 대함 받으면 좋겠지만 어쩐지 오해를 불러 일으킬 것 같고 몽매한 오점에 자신도 확실하게 설명하기 어렵다면 굳이 드러내고 들추고 다시 가리기에 급급한 싸움으로 키울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나저나 비단 영화에서뿐만은 아니겠지만 사람들은 ‘감히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싶은 일탈과 비도덕적인 문제들을 잘 도 일삼고 눈 가리고 아웅하며 산다는 느낌이다.
마지막 대사가 인상적이었다.
사람은 세개의 삶이 있다고.
1. 공적인 삶
2. 개인적인 삶
3. 비밀의 삶
고작 사람 하나에 몇 개의 가면과 인생의 결이 따로따로 돌고 있다고 생각하니 이래서 사는 것은 피곤하고 고단하다.
그리하여 사람 한 명 한 명을 더 알아가는 것, 내 인생의 반경으로 들여 오는 것은 더 무겁고 엄청나게 큰 행사처럼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