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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막물고기 Apr 15. 2019

잘가, 동글아.

동글이가 떠났다.

2007년 2월 13일에 태어나 2019년 4월 12일 오후 4시경 떠났다.


13살이라는 우리 강아지 나이를 알려주면 아직도 아기 강아지 같다는 외모에 놀라는 반응을 즐겼었지, 많은 나이에 대한 준비를 전혀 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이렇게 갑자기 떠날 줄 몰랐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직면하고 나니 예상했던 상황이라는 건 환상, 동화, 꿈같은 일이었음을 그 당연한 사실이 망치에 머리를 얻어맞고 난 뒤 한방에 떠올랐다.

동글이의 기력이 천천히 쇠하고 차츰차츰 꺼져가는 생명의 온도에 맞춰 나 또한 마음을 정리할 시간을 같이 보탤 수 있을 줄 알았다.

동글이가 마지막 숨을 거둔 병원에선 명확한 사인을 찾지 못했다.


이사날 아침 동글이

4월 9일 우리 집은 이사를 했다.

그 날은 바람이 거셌고 먹구름이 차츰차츰 몰려오더니 사다리차로 짐을 올리는 막바지부터는 한두 방울 비가 떨어지다 거세진 꽤 쌀쌀한 날씨였다.

당연히 집은 추웠고 동글이에게 옷을 입히고 담요를 돌돌 말아 제 집에 앉혀 두어도 엄마와 나를 졸졸 따라다니고 싶어 했다. 

짐을 나르는 낯선 사람들과 쿵쿵거리는 소음 자신을 포근히 안아주지 않는 엄마와 내가 힘들고 서운했었을까?

이사 첫날 풀이 죽은 동글이를 '알아서 잘 자겠지 뭐'하며 물건 정리로 지친 엄마와 난 우리대로 또 힘들다고 곯아떨어졌다.


다음날까지도 사료를 먹지 않아 평소대로 라면 입꼬리를 헤~ 위로 올리고 살랑 거리는 꼬리로 이미 반가움이 먼저 나오는 닭가슴살을 잘게 잘라 섞어 주었는데 앞다리에 힘이 없는지 제대로 서지도 못하고 엎어져서 먹었다.

그리고 11일 밤부터는 숨을 거칠게 쉬었고 닭가슴살과 브로콜리, 찹쌀로 만들어 준 죽은 아예 먹지도 못했다.

한번 숨을 들이쉴 때 뱃가죽이 힘껏 말려 올라갔다 내쉬면서 볼록하게 꿈틀거렸고 편하게 누워있지도 못했다.

12일 엄마가 쉬는 날이라 병원에 데리고 갔고 체온도 심장소리도 정상적이지 않아 큰 병원으로 가보라고 했다.

병원을 옮기면서 엄마에게 동글이가 심각한 상태라는 전화를 받았다.

큰 병원으로 옮겨 갔으니 고비를 넘기고 며칠 입원하면 다시 만날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검사를 채 끝까지 받지도 못하고 곧 떠날 것 같다는 마지막 엄마 호출을 받고 회사에서 뛰쳐나와 병원에 도착했을 땐 산소 호흡기와 심장마사지로 겨우 숨만 붙어 있는 상태였다.


이제 그만 보내주자고 인사를 하라고 했다.

이미 초점 없이 풀려 있는 눈을 보고 옆으로 축 늘어진 다리를 보면서 동글이가 내 곁에 없는 삶의 시작이 들이닥치고 있었다.

앞발을 잡고 잘 가 라고도 가지 마 라고도 어떤 말도 하지 못한 채 훌쩍거렸다.

내 수명의 몇 년을 떼어줄 수 있다면 그렇게 해서 이 아이가 다시 눈을 뜨게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하얀 상자에 담겨 나온 동글이를 안아 들고 반려견의 죽음 후 어떻게 장례를 치르는지 간단한 설명을 들었다.

알아서 알아보고 하라는 거였다.

눈물과 콧물로 시야가 뿌연 상태에서 그나마 가까운 장례업체를 찾아 예약을 했다.


내 강아지는 하루아침에 싸늘하게 식어버렸는데 현실은 남아 있었다.

인터넷 이전 설치 기사님이 온다고 해서 집에 문을 열어주러 갔고 아침에 엄마품에 안겨 나갔던 동글이는 상자에 담겨 들렀다가 화장 후에는 유골함에 담겨 돌아왔다.


흔해빠진 노래 가사처럼 떠난 뒤에 못해준 것만 왜 이리 생각나는지 싶었는데 그 못해준 것들에 잠식당한 슬픔은 내가 얼마나 형편없는 사람이었는지에 대한 미안함과 그럼에도 우리 강아지는 천사였었기에 부끄러워 울고 보고 싶어서 울고 불쌍해서 또 울었다.


이사 다음날 자기 좀 안아달라고 유난히 보챘었다.

핸드폰만 하면서 새로 산 소파가 좋다며 뭉개 쉬느라 안아주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려 내려가지 않았다.

엄마가 퇴근한 저녁 땐 무릎에 앉아 바라보는 시선이 달랐었다.

강아지들이 눈을 반쯤 뜨고 그윽하게 쳐다볼 땐 ' 이제 그만해'라는 시그널이라고 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엄마 나 이제 그만해도 되겠지?' 물어봤던 게 아닐까 싶다.

12일 아침 병원에 데려가기 전 쓰레기를 버린다고 엄마와 내가 함께 나갈 때 덮어준 이불을 털어낼 힘도 없으면서 그 담요를 등에 얹고 배웅을 나왔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병원에선 강이지의 염증 정상수치가 7-9라면 동글이는 270이 넘는다고 했다.

평소에도 몸이 당연히 아팠다는 증거였는데 모자란 보호자는 '몰랐었다'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몰랐으니까.

시츄는 요구하지 않는 품종이라고 한다.

아픈 것도 잘 참고 산책을 자주 시켜 주지 않아도 난리 치는 법이 없었다.

순둥 하고 얌전한 동글이는 마치 엄마 힘들까 봐, 나 힘들까 봐 알아서 잘 있어준다고 생각했다.

무던한 동글이에게 보호자는 예민하지 않은 돌봄으로 게으름으로 길들여진 것이다.


가끔 코로 꿍얼거리고 아우웅하며 입으로 말하는듯한 소리를 낼 때가 있었는데 그게 꼭 '나 할 말 있어'라고 하는 것 같아 귀여워만 했지 실은 아프다는 소리였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이제서야 든다.

동글이를 보내는 날도 많이 울었지만 밖에 나갔다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동글이가 없다는 사실이 실감 나 엄마와 부둥켜안고 다시 한바탕 쏟아냈다.

두번 앉아본 동글이 새 집

잠잘 때 유난히 거슬렸던 코 고는 소리, 자박자박 걷는 소리 등 동글이가 일으키던 소리와 온기와 냄새가 사라진 집은 적막하고 쓸쓸했다.

이사 간 집에서 우리 강아지도 예쁜 새집에서 살라며 사주었던 집과 딱 한 개 주고 그대로 남아버린 개껌 간식, 셀 수도 없이 많이 남은 배변패드만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엄마도 나도 3.2kg의 그 작은 강아지가 이렇게 큰 존재로 스며들어있었는지 알 길이 없었다.

사랑한 생명의 크기는 떠났을 때 비워진 자리를 보고서야 가늠할 수 있었다.

짐 정리가 끝나갈수록 동글이가 없는 풍경이 서글퍼졌고 이사가 원망스럽다.

더 많이 사랑한다고 해주지 못해서, 안아주지 못해서, 한참을 더 미안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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