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를 따라 다시 바다에 갑니다.
비는 언제 그칠까, 이불도 정리하고 이튿날의 여정을 떠나야 하는데..
머리속은 조급함으로 발을 동동 구를 때쯤 하늘이 차츰 차츰 개었다.
전날 전신주를 흔들고, 차를 기우뚱 거리게 할 성난 바람이 먹구름과 함께 밀려가고 있었다.
그 어떤날 보다 감격스럽게 하늘 사진을 찍었다.
간 밤의 생활살림들이 널부러져 있었고, 깔끔하고 정돈된 캠핑 생활을 하고 팠던 희망사항과는 거리가 멀었던 하루였지만 물건 하나 하나가 소중하고 기특했던 순간이었다.
캠핑 떠나기전, 유튜브 영상에선 디자인도 예쁘고 실용적이며, 게다가 공간도 별로 차지 하지 않는 신식 용품들이 많아 어떤 각도로 사진을 찍어도 '감성 캠핑' 느낌이 보였다.
십년도 더 지난 코펠, 보온병,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버너, 이번 차박을 위해 대여한 에어메트, 이부자리 등 아직도 쓸만하거나 쓰임새를 찾아주는 중인 내 용품들은 예쁘게 보이진 않더라도 요긴하게 제 역활을 해냈던 것이다.
없는 물건을 한 두개 더 살 순 있어도 이것들이 제 쓰임새를 하는 한 바꿔치긴 하지 말아야 겠다고 다짐한다.
날씨는 풀렸지만 바다 부채길은 여전히 들어갈 수 없는 상태였다.
이렇게 미완성의 목적지를 남겨두면 다음번에 다시 올 계기가 될 것이다.
엄마는 구름사이로 촘촘히 넓혀가고 있는 햇살처럼 밝고 더 없이 명랑한 목소리가 되었다.
편의점에서 얼음컵 2개를 산것도 하하 호호, 얼음컵 2개를 보온병에 넣어 커피를 시원하게 먹을 수 있는것도 하하 호호,
태어나서 한번도 울적했던적이 없었던것 처럼 화사했다.
그리고 엄마의 기운으로 나도 끌어올려지는것 같았다.
너는 왜 매번 심각한데, 뭐가 그렇게 슬픈데, 왜 침울한데, 같은 물음과 밝은 성격을 향한 강요가 심심찮게 일어났었다.
그래서, 주변 평가와 질책에 힘들었다는 말을 하고 싶은건 아니고, 나 역시도 감정표현이 분명한 유쾌한 사람들이 좋을적도 있었기 때문에 어느만큼은 핀치를 올려 명랑함을 맞출 수 있는지 알게되었다.
다만 내가 가진 에너지 이상을 끌어올리는 일이기 때문에 적당히 어울릴 수 있는 기분을 맞춰줘야 할 것 같은 눈치를 보고 난 후에는 급격히 피로해졌다.
혼자와 다수, 다수와 혼자 사이의 강약 균형을 맞춰가며 사람을 만나고 있다지만, 홀로된 편함을 더 편애하는 중이기도 하다.
엄마는 내가 가장 편하게 만날 수 있는 세상 유일한 사람이다.
물론 엄마의 눈치,기분을 살피기도 하지만 불편하고 고된 느낌은 아니다.
엄마를 존경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내가 하고 싶은 배려일 뿐이다.
반대로 엄마 또한 내 기분을 살피고, 살뜰히 보살펴 준다.
운전하면 손등이 탄다며 장갑을 끼워주고, 살빼라고 늘 핀잔을 주면서도 먼저 가본 음식점, 맛본 음식은 꼭 먹여주려 한다.
참견과 잔소리, 애정 그 경계선을 적절히 조절한다고 느끼는건 서른 다섯의 딸을 키운 엄마의 노련미와, 어떤것이 간섭이고 걱정인지 사리분별을 좀 할 줄 알게 된 내가 만들어낸 평화일 것이다.
동해시 망상동에 있는 망상해수욕장으로 갔다.
전날 태풍이 불러온 해일이 모래 사장을 길 안쪽까지 밀어올렸고, 목조 그네가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푹 파묻힌 곳도 있었다.
큰 태풍이 지날 때 하늘과 바다가 아래 위로 뒤집어진다고 한다.
하늘에도 숭덩숭덩한 구름의 파도가 치고, 바다는 말할 것도 없었다.
망상해수욕장은 7번국도를 따라 내려가다 저쪽에 한번 들려보자라며 충동적으로 정한 여정지였다.
2박3일의 대략적인 여행지는 엄마가 미리 계획해두었지만 가장 큰 계획은 길가다 들러보고 싶은 곳에 들러보자였다.
충동이 목적 실행이 될 때 좋았던 예는 망상 해변이었고, 나빴던 예는 강구항이었다.
강구항은 세번째날 가게 된 곳이고, 대게나 한번 먹어볼까 ? 해서 간 곳인데 대게는 너무 비쌌고, 비싼 가격을 뛰어넘을만큼은 엄마는 식욕이 없었다.
" 이번 기회에 먹어도 좋고.. 아니어도 괜찮고... 전에도 누구 엄마랑 여기 대게 먹으러 왔었는데 비싸서 홍게만 먹었거든 "
미지근한 반응에 나도 먹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가격이 높아 선뜻 결심이 안설땐, 먹자 먹자 먹어보고 싶다 하는 강력한 식욕 동기와 휩쓸리는 분위기가 받쳐줘야 하는데 둘 중 어느것도 되지 않았다.
가끔 또렷하게 종잡을 순 없는데 엄마와 어색한 분위기가 될 때가 먹는 문제다.
나는 배가 고픈데 엄마는 고프지 않고, 나는 소화가 안되는데, 엄마는 안먹으면 기력이 없고, 나는 다양한 것을 먹어보고 싶은데 엄마는 익숙한 음식이 좋고 하는 문제들 말이다.
먹는것 가지고 '치사하게'굴지말라는 말이 있다.
치사한 마음이 들지만 표현하기 걸끄러운게 또 치사함이라 데면데면 해지는 것이다.
망상 해변 근처엔 한옥마을이 있었다.
숙박시설로 지어진 건물이었는데 배후엔 푸른산을 끼고 앞면엔 드넓은 바다를 보고 지어진 건물이라 저곳에서 자면 신선같은 기분이 들 것 같았다.
더불어, 신선까진 아니겠지만 비도 없고 바람도 잔잔한 오늘의 차박은 꼭 기대한 이상과 근접한 잠자리를 만들어야겠다는 욕심이 생겼다.
장소를 이동하면서 차박을 하면서도 편안한 숙식 도움을 좀 받을 수 있는 오토 캠핑장을 계속 찾아보았다.
캠핑장이 있는 곳들이 대부분 해수욕장 근처 였다.
두번째 이동지는 추암 촛대 바위였다.
입구 주변에는 어른 무릎 높이 만큼 올라오는 크고 토실한 오리와 거위가 풀밭에서 놀고 있었다.
자그마한 아이가 몸을 웅크리니 오리와 비슷해보였다.
기암괴석이 첩첩히 쌓인 주변으로 출렁다리, 전망대를 오가며 빙 둘러 바위들의 절경을 감상할 수 있도록 조성되어져 있었다.
태풍과 해일의 여파로 출렁다리는 출입금지라, 촛대 바위가 잘 보일 수 있는 전망대쪽을 올랐다.
바다에서 솟아 오른 형상의 괴석의 모양이 촛대와 같아 촛대바위라고 불린다는데 무슨 모양이라고 이름을 붙여주면 그렇게 봐야된다는
고정관념이 생기는 것만 같다.
예전의 엄마는 사진을 참 많이, 자주 찍어달라고 했었다.
그것도 엄마의 얼굴이 정중앙에 들어가도록, 렌즈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는 사진들 말이다.
함께 사진을 찍어주지 않는다고 많이도 서운해하셨다.
나는 자기 모습을 확대사진으로 출력까지 하는 엄마가 이해 안되었고, 엄마는 대체 왜 사진을 남기지 않는지 이해가 안된다고 했다.
그러다 자연스럽게 절충안으로 맞아진 시점이 근래 엄마는 자신의 모습을 뒷모습이나 옆모습, 혹은 멀리서 찍어주는 모습을 더 선호하게 되면서 부터다.
" 그러니까, 이제 가까이서 찍으면 내 얼굴에 주름이 많이 보이는걸 . . "
엄마, 엄마 얼굴은 예나 지금이나 주름은 늘 많았어 그런데 그때도 지금도 쭉 이뻤어 라고 말해주었다.
가까이 얼굴을 바라보며 자신을 들여다 본 방식에서 멀리 시점을 바꾼 엄마의 옆, 뒷모습을 앞으로 더 근사하게 찍어주고 싶다.
오토 캠핑 예약이 가능한 울진 구산 오토캠핑장을 찾았고, 현장에서 결제를 했다.
여기도 고양이가 있었다.
일본에 고양이가 많은 아오시마 섬이 있다면 동해엔, 구산 해변이 있었다.
우수수 떨어진 푸른 솔밭에 사냥감을 응시하는 고양이, 관리인 주인에게 몸을 부비며 방문객을 노려보는 고양이들이 저마다 제 할일로 부지런히 귀여움을 떨었다.
드디어, 그늘막을 따로 펼 수 있었고, 차안의 짐을 바깥으로 빼낸 뒤 에어매트를 안락하게 깔아 볼 수 있었다.
트렁크에 밤을 밝힐 꼬마 전구도 달 수 있었다.
내 손으로 먹고 잘 공간을 만드는게 잊고 지냈던 어렸을 적 소꿉놀이 하는 기분이 들었다.
살림살이와 매우 유사한 활동이지만 가사 노동이라는 생각은 절대 들지 않는다.
4인가족, 3인가족, 연인, 남자 한명, 단체 등 다양한 사람들이 캠핑장에 거리륻 두고 자리를 폈지만 엄마와 딸은 우리 둘 뿐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앞으로 더 차박 캠핑을 자주 떠나보는 쪽으로 기우는 중이었다.
어떤건 꼭 있어야 되겠더라, 이건 없어도 되겠다, 다음엔 어디로 가볼까 하는 이야기를 하면서 오리고기를 볶아 먹고, 맥주를 마시고 죽도 끓여 먹었다.
엄마와 또 자주 나누는 대화의 소재는 나이 먹어가는 것에 대하여다.
신체의 변화, 기분의 변화, 사람을 바라보는 나의 방식, 갈등을 풀어가는 나의 이해 등등.
어느덧 뭘 모르는 어린 나이가 아닌 딸과, 노년에 접어들고 있는 엄마는 제법 친구가 되어가고 있었다.
엄마한테 혼이 날까봐 거짓말을 한 적이 많다.
엄마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 숨겨둔 것들도 많았다.
나의 잘잘못을 평가하지 않고, 딸을 자신의 기대와 이상에서 분리시켜줌으로서 엄마가 조금씩 편해졌다.
어쩌면 나는 엄마의 청춘을, 야망을 굴복시키고 도둑질한 나쁜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상에 수없이 많은 다정한 모녀와, 서로 안보고 사는게 숨통이 트이는 모녀, 서로에게 관심이 없는 모녀가 있지만
이 모든 관계속의 엄마와 딸은 한 곳에서만 머물러 있지 않다.
엄마는 나의 신앙, 종교의 또다른 이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