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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막물고기 Jun 29. 2021

K양과 C군의 서운함

연애,서운한 희망

서운함이란 감정은 자기 연민으로 똘똘 뭉쳐진 천년묵은 코딱지 처럼

버석하고 단단하며 더럽다.

아무리 내 반쪽을 내어준, 내어줄 사람이라며 그 사람에게만은 예외의 너그러움을 둔다고 하지만 그건 상대방에게 건네는 혹은 자기 본능을 기만하는 달콤한 다짐같은 말이다.

내일부터 술을 안먹겠습니다.

내일부터 건강한 음식만 먹겠습니다,

내일부턴 객기를 부리지 않겠습니다,

내일부턴

내일부턴

언제고 무너질 결심들을 그러모아 쌓고 허무는 과정을 반복하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수많은 명사들의 주옥같은 말들을 되새기며 마음을 다잡고

고개를 끄덕거린다고 해서 새롭게 알게 된 진실이란 없고, 원래 그러지 말았어야 인간답게 살 수 있는것들이 한번 더 되새김질 하며, 머리와 마음을 훝고 내려갈 뿐

내일의 내가 달라져 있진 않다.

실천은 얼마나 비약적인 단어란 말인가.

정정하겠습니다, 시정하겠습니다의 비장한 말과 마음의 토대를 세운다고 기둥 이후의 삶이 대단히 달라져 있진 않다.

이전과 이후의 자신을 둘로 갈라 각각의 영토에 세워 둘 수 있는 위인이란 이전에도 이후에도 몇 없을 것이다.

설사, 두 세개의 삶이 판이한 영화 장르로 이어진다 해도,

앞뒤가 맞지 않는 사람, 개연성이 부족한 한편의 생에 지나지 않는다.

내 감정에게 바란다.

적어도 상대방의 고달픈 현 상황을 한번씩 업데이트는 해두면서 누울자리를 뻗었으면 좋겠다.

아니, 위엣말 그대로를 그린다면, 나는 있는 성질 없는 성질 머리 다 끌어다가 마음대로 사용하는 사람 같아 보이지만 정작 그럴 위인도 못된다.

이런 말을 하면 상처 받지 않을까, 이 표현보다 조금 더 온도가 높은 말은 없을까 전전긍긍했고

마땅한 표현이 없다면 함구하는 쪽에 가까운 딱딱한 내향성의 인간으로 포장하며 살아왔는데

누울 자리를 보고 발을 뻗으라는 말은 나에게 좀 심했다.

다시 생각해본다.

갈등의 실마리가 풀리지 않았을 때, 첫 발단을 생각해보면 어이가 없고 허무맹랑한 기싸움에 에너지를 쏟았다는것을 알게 된다.

일방적으로 잘못을 한 원인제공자가 있을 땐 갈등의 원인 파악도 해결도 심플해진다.

그런 사람들이야 손절하면 그만인거고 문제는 대게 좋은 관계, 혹은 더 나아가 사랑과 애정으로 애지중지 대해온 사람과의 석연치 않은 대화가 오갈 때 생각의 꼬리를 무는 불면의 밤이 시작된다.

그런 관계속에선 보편적이고 이상적인 어른의 언어와 평정심을 유지하기 어렵다.

매번 다른 이유로 트러블이 있던것으로 볼 수 있겠지만 같은 대상과의 다툼이

몇번 반복되다보면 비슷한 유형이 느껴진다.

이 유형의 이름을 결핍의 상충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싶다.

예를 들어가 아니라, 사건의 팩트인 나 K양은 평소 호전적인 애교와 유머를 가미하며 상대방을 웃길줄 알고, 긴장을 풀어줄 수도 있는 징그럽지만 유쾌한 여자친구 역할을 해낼 수 있고,

C군은 K양의 농담에 맞춤 훈련된 고도의 받아치기 기술과, 역으로 골려주기 스킬을 이행하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끌어갈 수 있다.

그러다 한번씩 C군과 K양은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며 각자의 개인사나 회사일로 지칠때가 있는데

C군이 힘들 때 으례 연인사이에서 보고 싶다는 이유를 무기로 K양이 투정을 부리면 C군은 투정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질타로 받아들이게 된다.

자신은 이렇게 열심히 힘을 내고 애를 쓰며 K양과의 시간을 만들려고 애쓰는 중인데 그 노력을 부정당하는 느낌이란다.

반대로 K양은 서로를 향한 보고싶음의 투덜거림은 국가가 허락한 마약 정도의 표현으로 인식하고 있는데 갑자기 난색을 표하는 C군의 태도에 아무리 내가 누나라도 그렇지 힘듬의 가중치를 따박 따박 비교해가면서 어리광은 일절 받아줄주 모르니 머쓱하면서도 서운해지는 것이다.

K양이 봄날의 흙구덩이를 뒹구를 똥개처럼 마냥 어리광만 부리고 싶었다면

오빠오빠 하다 아빠아빠를 부르짖을 법한 어르신들에게 귀여움을 받고 살면 되겠지.

하지만 K양의 많은 이성적 대뇌는 서로 동등하고, 평등한 관계를 지향하고 편안한 대화와 삶을 공유하는 것에 맞추어져 있다.

어쩌다 한번의 무게가 다른것도 결핍의 상충이라는 이름을 뒷받침 하는 요소가 된다.

C군은, 어린나이에 가장의 무게를 일찍 짊어진 사람으로, 자신이 하고 싶어 했던 일 보다 할 수 밖에 없는 일들 속에 살았다.

그 속에서 자신의 감정은 숨겨야 했고, 한참 놀고 싶고 먹고 싶은 나이에 많은 욕구들을 눌러 살아야 했다.

고통에 대한 신체적 마음의 신호들은 때를 놓친 뒤 앓아 눕는 경우도 많았다.

때문에 자신이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와중에 외부의 사소하지만 ~ 으로 약빨을 친 표현들은 C군에게 유독 크고 아프게 다가오는 것이다.

자신은 혼신을 다 해 애쓰고 있는데 이게 모자라, 저게 부족해라고 질타하는 것만 같아서.

K양은 성인 남성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은 기억이 없다.

아빠는 아들이 최고인 사람인 와중에 장녀에 대한 책임을 지우며 알콜 깽판의 뒷수습을 맡겼다.

다 자란 뒤 두 세번의 짧은 연애를 반복하면서도 K양, 너라서 좋아라는 말은 들어본적도 없고 설사 들어봤으나 기억이 안난다 하더라도 그들의 사랑은K양의 조건에 따라 달라졌다.

K양은 알고 있다.

C군의 고생과, 지나온 희생과, K양에게 한없이 따뜻한 사람임을.

그럼에도 한번씩 잔뜩 주눅든 어린K양이 스물 기어나와 C군의 마음의 밭에서 데굴 데굴 굴러다니고 싶어하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C군은 그 밭에 가지를 쳐주고, 꽃을 심어줄 포근한 사람이 찾아와 주길 바랄 때였다는걸

눈치 없는 어린K양은 모르고 있었다.

K양과 C군은 그래서 서운하다.

운이 좋았다면 어린K양이 눈치 보지 않게 구를 수 있는 밭이 될 수 있었고,

운이 좋았다면 성숙한K양이 C군의 밭을 가꾸러 갈 수도 있었는데 말이다.

서로의 결핍이 다르 다는건, 영원히 채워질 수 없는 밑빠진 독이다.

그럼에도 너를 위해 한번 더 서운하지 않게 애써보겠다는 다짐을 한다.

나의 서운함을 알아달라고 곁에 붙어 있고 싶어한다.

그렇고 그런 서운함이 엉겨 붙으면 밑빠진 독을 아주 조금을 메꿔 줄 수 있는,

약간은 쓸모 있는 알갱이 그 무엇은 되지 않을까.

코딱지처럼 더럽고 버석하다며 던져두기엔 아쉽고 애잔한 감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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