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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막물고기 Aug 11. 2021

석별의 정

떠난 빈자리를 메꾸어 줄 누군가가,

어떤 일이 오래 지나지 않고 들어찰 수 있다면 헤어짐이란 먹먹한 슬픔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저, 한 계절이 돌고 돌아 다시 찾아오는 것처럼 의연하게 보내줄 수 있을까.

어렸을 적, 4남 1녀의 셋째 아들 아버지와 1남 3녀의 막내딸 어머니 밑에서 비록 서울과 대구라는 먼 거리에 명절에나 왕래할 수 있었더라도 사촌들과 복닥복닥 어울리며 지냈었다.

외가, 친가 모두 비슷한 또래거나, 터울이 적은 언니 오빠들이어서 오랜만에 만난 서먹한 몇 시간을 넘기고 나면 밤이 새도록 어울려 놀았다.

뭐든 빨리 배우고 흡수할 수 있었던 어린이의 총기는 부대껴 어울려 놀기 시작한 하루가 지나지 않아 경상도 사투리를 따라 흉내를 내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는 명절의 끝이 오면 헤어짐이 아쉬워 침울해졌다.

조금이라도 늦게 떠나길 바라는 마음을 숨기지 않았던 할머니는 집으로 돌아가는 차 뒷문을 열어 인사를 하면 주머니 속에서 꼬깃꼬깃 접어두었던 만원을 용돈으로 하라며 밀어 넣어주셨다.

덩그러니 무릎 위로 떨어진 돈과,차 안에서 흘러나왔던 애달픈 목소리의 트로트 노래는 한 장의 엽서사진처럼 저장되어 있다.

내가 보아온 친절과 사랑이 전부라고 믿던 시기에는 만나서 즐거운 사람들과는 모두 영원히 어울려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다들 헤어짐이 아쉬워 어쩔 줄을 몰라하며 어른들의 자식들에게 서로 용돈을 찔러 주려 안달이 났던 상황을 되새겨보면 친척들 간의 소란했던 경상도식의 정을 떠올릴 수 있었다.

맞벌이 부모 밑에서 엄마가 없을 땐 누나가 엄마 대신이라는 임무를 부여받은 장녀들은 자신보다 조금이라도 나이가 많은 사람들에게서 받는 보살핌에서 유독 헤실헤실 마음을 풀어 놓는다.

친척 언니 오빠들에게도 각자의 생활이 있고 어쩌면 어서 명절이 끝나 일상으로 돌아가는 편을 더 그리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할 수 없었다.

나중 한 티비프로그램에서 사촌동생, 조카들에게서 벗어나고 싶은 명절증후군을 소개한 사연을 보고 무조건적인 보호 대상 딱지를 달고 불쑥 쳐들어오는 꼬마들이 달갑지 않을수도 있겠구나 짐작할 수 있었다.

무튼, 그때는 명절의 아이로 언니 오빠들 틈바구니에서만 자라고 싶다고 종종 기도하며 명절을 기다렸다.

하지만, 할머니 할아버지의 이른 부재와, 어머니 아버지의 이혼을 지나면서 명절의 설레임보단 피곤함이 더 앞서는 현실적인 감정들이나, 사촌 언니 오빠들이 자기 삶에 집중하는 자연스러운 시간을 차근차근 받아들이기 어려웠다ㆍ

한 살 두 살 꼬박꼬박 나이를 먹고, 몸이 커지면서 때와 시기에 맞는 사회화 학습이 있다고 한다.

간헐적이었지만 내겐 꽤 큰 의미가 있었던 친족 공동체와의 갑작스러운 분리, 그 시기쯤 또래 친구들에게서 배제당하는 느낌을 자주 받기 시작하면서 예고되지 않은 이별의 챕터로 넘어가며 어느새 앓고 있었다.

내가 먼저 도망치고 싶었던 사람들, 공간과의 분리는 새로운 해방이면서도 혼란이었다.

떠나기 직전까지도 아니, 떠난고 난 후에서도 내가 마지막을 원했던 게 맞았을까 하는 의문에 사로잡혔다.

어렸을 때 본 어른들은 적어도 헤어짐에 관해선 본심과 다르게 툭툭 말을 던져야 한다고 교육이라도 받은 것처럼 보이는 것과 다르게 무심한 말들을 하곤 했다.

“ 에휴 어르신 그냥 가시지, 뭘 이런 걸 싸주신다고.. 집에서 먹을 사람도 없는데...”

라면서 소분 된 비닐봉지로 꼼꼼하게 매듭을 지어 놓는다.

그리곤 먼저 간 할머니의 뒷모습을 몇 번이고 돌아본다.

본심을 감춰둔 화법으로 어른 행색을 차리고 있을 뿐, 마음 한 구석에선 떠나보내야 할 때를 알지 못하는 아이의 응석이 더 많이 느껴지곤 한다.

꽤 많은 사람들과 적지 않은 장소들을 떠나고, 보냈다.

더이상 사람들과의 이별에서 울지 않을 수 있었던 건 만나고 헤어지는 반복에 익숙해져갔기 때문이다.

할머니가 눈물을 훔쳤던 소매끝을 못 본척 넘어가고, 사촌 언니 오빠들과 함께 모여 살고 싶다는 말을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던 건 우리는 돌아가야 할 자리가 있다는 무력한 수긍이자 결과를 인정할 수 밖에 없었을 뿐이다.

때를 알고, 헤어짐을 준비하는 시간을 갖는 사람들보다, 그러지 못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차츰차츰 소원해지는 관계들은 파도의 해일처럼 밀려났다 들어찰 수 있고, 관계의 끝이라고 선을 그어두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이제는 알 수 있다.

내가 달려간 종착역에 누군가는 먼저 와 있을 수 있고, 누군가는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을 수 있음을 인정해야 했다.

늘 떠밀려, 이 곳으로 갑작스럽게 떨어진것처럼 난데 없는 표정을 짓곤 했지만 실은 생각보다 유유히 여정을 마친 관계일 수도 있었다.

할머니가 서울로 돌아가는 엄마와, 나를 배웅해주던 김천역으로 향하던 길이 떠오른다.

해는 뉘엿 뉘엿 넘어가고, 택시 안에서는 옥구슬이 또랑 또랑 울리는 목소리의 가수가 구슬픈 뽕짝을 부른 테이프의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할머니의 서운함이 늘어진 테이프가 울렁이며 미끄러지는 소리처럼, 오르내리는 것 같았다.

엄마는 왜 할머니의 딸로 곁에 살 수 없는지, 나는 엄마 곁에서 얼마나 떨어지지 않고 살 수 있는지, 왜 우리는 다 같이 헤어지지 않고 살 수 없는지 답답함에 멀미가 났다.

이별의 기조와 색, 온도, 분위기를 생각하면 그때가 떠오른다.

명쾌하게 정의할 수 없지만 이제는 각자 살던 곳으로 가야 한다는 것.

그 곳에서 서로 잘 살아가기를 바래주는 것.

그때 할머니에게 철부지 손녀답게 애교를 부리고 눅눅한 공기를 좀 지워줄 걸, 할머니 손을 잡아주거나 무릎을 베고 체온을 더 느껴보았으면 더 좋았을 걸 하는 아쉬움이 진하다.

그 곳, 그때의 색채를 잊지 않고 사는 한, 마지막 장소에서 만나는 이들과의 앞으로 만들어갈 엽서는 따뜻한 말 한마디를 덧붙여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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