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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막물고기 Aug 25. 2021

안녕

미안하고 고마웠어


아빠가 돌아가셨다.

사망 추정시간으로 건너 전해들었을 만큼, 아빠는 외롭게 원룸에서 언제 죽었을지 모를 고인이 되어 있었다.

맞은편 집 거주자가 약 2주간 자가격리를 끝내고 나온 8월13일쯤, 벌레와 역한 냄새가 심해 신고를 했고, 전신이 부패한 상태였다고 했다.

휴대폰에 발신 정보와, 카드 사용 기록이 8월5일 이후로 없는걸로 봐서, 5-6일 사이에 돌아가신게 아닐까.

부검결과는 별다른 소견은 없었고, 간경화라고 했다.


술.

엄마 아빠의 최대 이혼 사유이자, 어린시절의 음울한 기억 대부분은 아빠, 그것도 술마시는 아빠였다.

분명 아빠가 날 사랑해준 시간도 많았을텐데 힘들고 고통스러운 기억은 좋았던 순간들을 새까맣게 지워버렸다.

그래서, 내가 가정사를 털어 놓을 수 있는 연인, 가까운 친구들에게 아빠의 객관적인 평가를 제공조차 하지 않았을 수 있다.

어쨌든 그들은 나의 힘듬을 위로해주고 들어주는걸 우선으로 해주기 때문에,또 남의 부모님에 대해서 지탄을 내릴 수도 없는 입장이라, 나의 입을 통해 알게된 아빠는 그저 나쁜 사람이었을지 모른다.


시신의 부패가 심해, 병원으로 옮기는 것도 옮겨진 뒤 아빠가 거주했던 원룸을 치우는것도 많은 비용과 죄송한 말들을 전해야 했다.

세상에 비춰진 아빠의 마지막은 15년전 이혼을 하고, 고독사를 한 노인이였을거다.


엄마 아빠의 이혼후 아빠는 이미 죽어있다시피한 사람이었다.

한번도 찾아뵙지 않았고, 아버지의 자식의 도리를 운운하는 사람들에게 바득바득 이를 갈 뿐이었다.


부모 자식의 천륜을 마지막 인정으로 삼아 어디서든 잘, 건강하게 사시기를 멀리서만 바랐다.

하지만 간간히 들려오는 소식은 그렇지 못했다.

개인사업으로 사용하던 기계를 형편없는 가격으로 매도하고, 여전히 술을 마시고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했으며, 조현병이 발병되어 정신병원에도 몇달씩 있었더라 하는 이야기들은 끝까지 내 귀로 들려왔다.


화장터에서 엄마는 펑펑 울며 말했다.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더니, 마지막까지도 내 손에 가고 싶은거냐며.

이혼후에도 아빠는 엄마를 놓지 못했다.

주변사람들에게 언젠가 다시 합쳐, 애들과 같이 살고 싶다고 말하면서 동시에 엄마를 거짓말과 음모로 음해했다.


조현병은 얼만큼 아빠의 진심을 왜곡하고 감추는 병인지 알수 없었고 알고 싶지 않았다.


홀로 쓸쓸히 떠난 마지막을 보고나서야, 어떻게 살아왔었는지 남겨진 물건들을 단서로 추정하면서부터, 아빠 지인들에게 부고를 알리고 덧붙여 듣게 되는 이야기로부터 15년 동안의 낯선 아빠를 다시 알아가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한 사람이 항변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야 다시는 마주치지 말았으면 싶은 사람에게도 연민과 동정이 생긴다는걸 알게 되었다.


세상에 갓 태어난 아기는 완전 무결한 순수의 결정체라면 세상을 떠난 고인은 그동안의 그 당사자를 향했던 분노,슬픔,박탈감 등등의 온갖 시끄러운 감정들을 맥없이 풀어지게 만든다.


아빠에게 품었던 모진 감정과 무관심을 반성하고 후회한다.

시간이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부모님이 이혼을 해도 아빠에겐 꾸준히 연락하고 왕래하겠다고는 결심까진 서지 않는다.

다만, 7월말 마지막으로 식사한끼는 했었으면 그렇게나 보고파했는데 한번은 만나볼껄 하는 미안함은 평생, 마음의 짐이 될 것이다.


한 사람이 60여년을 살다 갔는데 남겨진 짐은 참 초라했다.

시계, 지갑, 통장3개, 노트북, 핸드폰, 엄마에게 쓴 편지가 담긴 공책 한권.

나머지 짐은 오염되어 다 소각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2월경, 술이 부른 급성 간염으로 엄마와 내가 병원으로 갔었다.

그때도 아빠 얼굴을 보진 않았다.

면회가 안되는 시점이었고, 섬망증상으로 병원에서 만나지 못하게 했었다.

아빠 지인 한명이 얽힌 사건이 있었다.

그렇게 아빠를 챙기지 않을거면 보호자 포기 각서를 써라, 대리인을 나를 지정해서 위임장을 써라 등등 수상한 사람이 감놔라 배놔라 하는데도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휴대폰 카드 결제 내역서, 카톡, 문자 등으로 유추한 2월 이후의 아빠는 퇴원을 하고 병원을 오가며 약을 탔고 한동안은 술을 마시지 않다가 다시 손을 댄다.

650만원 짜리 손목시계를 샀고, 카톡 자신에게 쓰는 메시지에는 '사나이로망'

이라는 글자가 적혀있었다.

택시를 많이 탔다.

누군가 자꾸 자신을 죽이러 온다고 택시를 여러번 바꾸어 타며 길을 다녔다고 한다.

8월초에는 고모집에 갔었다.

종종, 전화 발신, 사진대신 동영상 키 누르기 실수를 하는 것처럼 고모집에서의 대화가 찍으려고 의도하지 않은 영상으로 32분 남겨져 있었다.

피사체가 없는 영상이지만 어쩐지 사람들과의 대화가 그리울때 한번씩 듣고 싶어서 주머니에 휴대폰을 넣고 동영상으로 저장한게 아닐까 싶기도 했다.

혼자 노래를 부르는 영상도 있었다.


남동생에게 사업체를 물려주고 싶어서 여기저기 알아보는 중이라고 했다.

식당앞 매점에서 계를 3구좌 들었고 조만간 받을 것이라고 했다.


아빠의 부채, 재산은 알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엄마와 동생은 아빠가 누구에게 사기를 당하고 있는지, 받을돈이 얼마가 있는지 알고 싶어했다.

동생은 엄마아빠 이혼후에도 아빠를 가끔은 만났다.

그러다 아예 연락을 끊고 산 계기가 있었다고 한다.

아빠가 떠나뒤 동생은, 어리숙하고 멍청한 사람이었지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누굴 해한적도 없고, 배우지 못해 몰랐던 사람이었을뿐이라고, 자기라면 그렇게 일 평생 손에 검은떼 묻혀가며 일하지 못했을거라고 말하며 울었다.


아빠가 내게서 앗아간 것들은 이제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돌이켜보면 그게 무엇이든 아빤 너무 외로웠고, 우리가 미성년자를 벗어나기까지 울타리가 되주었던 사람이었다.


아빠도 잘 살아 보려고 했을것이다. 그러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마음먹은대로 살아지지 않는 무력감 때문에 더 술을 찾고, 낯선 소리에 무섭고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불교 태생인 사람이 하느님을 찾고 교회에 다녀볼 정도로 절박했던 것이다.


화장하던 날, 승화원으로 가기전까지는 비가 계속 내렸다.

마치 아직은 그 곳으로 떠나기 억울하고 아쉬운게 많아서 울고 있는 망자의 모습이 비를 타고 눈앞에 서있는것 같았다.

납골당에 안치를 하고 나오니 하늘은 맑아져있었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무지개를 보았다.


아빠의 머리를 두드리는 여러명의 소리, 몸을 아프게 했던 당뇨와 간질환에서 해방되고 그토록 보고 싶었던 가족 세명을 한 곳에서 본 온화한 웃음이 무지개 끝에 걸려 있는것 같았다.


매정하고 서늘한 딸이었다.

모르는 얼굴의 차별에는 분노하며 그 편에 기꺼이 서 있을 마음이면서도 정작 방 한구석에서 가는 숨을 쉬고 있을 아빠는 들여다보지 못했다.


나의 이기심이 참담하게 아팠다.

이제와서 아빠에 대한 생각을 고쳐먹는다고, 미안함을 품는게 더 속물처럼 느껴졌다.


벌을 받아도 싸다.

그 벌은 사랑하는 남자친구의 이해와 위로를 받지 못하는 것으로 찾아왔다.


남자친구는 나와 비슷한 아픔이 있다.

알콜 중독자의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은 의기소침해질때가 있으며 눈치를 많이 보게 된다.

가족 구성원중 누군가 술을 많이 마셔라고 한다면 자잘한 사건은 말하지 않아도 들여다보였다.

우리의 연애시작도, 그동안의 서로를 생각하는 배려들도 같은 아픔에 대한 공감과 지지였었다.


큰 틀의 주제는 같았지만 똑같은 아버지와 자식이 아니니, 아버지를 향한 감정이 다를 수밖에 없지만 이렇게나 다른 질감일 수 있다는걸 새로웠고 충격적이었다.


아빠가 화장하는 내내 아무도 찾아올리 없는 단촐하고 작은 이 공간이 한없이 초라하고 비참했었다.

사교적이지도 못하면서 외로움만 많은 사람의 말로는 뒤늦은 가족의 슬픔만 담뿍 빨아먹고 홀연히 가는것 같아서 그게 꼭 내 마지막 같아서 참담한 기분이 들었다.


수많은 감정들이 타들어갔다.

안부를 물어주는 회사 사람들이 있었지만, 남자친구는 무심하게 느껴졌었다.


상을 치르고 집에 도착해서, 참았던 서운함을 터트렸다

어쩌면 전화 한통, 안부 하나 물어봐주지 않냐고.

그는 내가 신경이 쓰일까봐 물어볼수 없었다고 하며 걱정을 많이 하고 있었다고 했다.


그 걱정이라는건 어디에 가면 알아볼 수 있을까,

이건 저를 위한 걱정이니까 제가 가져가볼게요 하고 되찾아 오고 싶을 정도로 챙겨봐주는 마음이 간절했었다.


남자친구는 아버지에 대한 상처가 나보다 훨씬 깊은 편이었고 자신은 당장 내일 부고 소식을 들어도 아무 감정이 없기 때문에 나를 통해 들은 아빠와의 관계도 자기와 비슷할거라 생각했다고 한다.


떠난 사람의 뒷자리를 정리하다보니, 받은 상처와 분노가 전부가 아니었다고 말하면서도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공감할수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울고 있는 내 앞에서 그의 아버지와의 좋지 않은 기억을 떠올렸고, 인상을 찌푸렸고, 대화는 이어지기 어려웠다.


위로는 감정의 영역대가 다르면, 주고받기 어려운 종류였던걸까?

가장 내편이 되줄거라고 믿었던 사람에게서 비소를 봤고, 우리가 이렇게나 달랐던 사람이었음을 한장의 보고서로 정리받은 느낌이었다.


회사를 출근하면서도 평정심을 찾기가 어려웠다.

하루에도 몇번씩 울컥 울음이 솟다가, 화가 났다가, 침울해진 뒤 또 아무렇지 않았다.


불안정한 감정과, 응어리진 서운함은 갈수록 똘똘 뭉쳐 멍울을 만들었다.

사소한 말 한마디에도 우리 관계는 휘청거렸다.


많이 힘들지, 내가 뭐 도와줄건 없을까, 도움이 필요하면 말해줘

라는 말이 듣고 싶었다.

하지만 우리는 사랑싸움을 하는 연인들처럼 왜 내 입장을 조금 더 이해해주지 않냐며 싸웠다.


처음 그와 연애를 시작하기 전에 비슷한 결핍이 있는 사람들인데 서로 부족한 점을 채워줄 수 있을지 걱정했었다.


그동안에도 크고 작게 다투긴 했지만 찜찜한 감정을 남긴채 화해한적은 없었다.

아무리 아빠와 정이 없었고, 애틋하지 않았다고 해서 슬픔을 느낄 자격조차 없는건 아니었다.


나는 죄책감을 느끼고 힘들어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불온을 혼자 떠안고 있기가 뜨겁고 무거웠다.


나의 불행을 같이 덜어달라는게 아니었다.

아빠를 팔아, 나를 더 사랑해주길 바라고 떼쓰는 사람처럼 생각하는게 아니면 이다지도 냉정하게 자기 기분을 앞세울 수는 없을것이다.


내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지지까지 원하는게 아니다.

비난, 질타, 걱정 그 어떤것이라도 난 아빠를 나누고 싶었다.


아빠가 갔고,

남자친구는 보내주어야 할 것 같다.


많은 사람이 떠나는 가을이 오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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