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 좋아봤자
어제의 퇴근길은 모처럼 날이 포근하였다.
길었던 설 연휴 5일 내내 바깥바람 한번 쐬지 않다가 강제적 의미가 부여된 출퇴근길이 돼서야 뺨에 닿는 온도차가 달라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때의 기분은 마치 5일이 아니라 약 50일 만의 반계절을 지나고 출소한 사람의 심정처럼 짠내음 베인 회한이 몰려왔다.
'시간이 또 이렇게 갔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문장을 시간에 붙여 생각할 줄 몰랐다.
나는 이제까지 급할 것이 없었고 무언가에 쫓겨 생활해본 적이 없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조급해야 할 이유와 나이가 되어버렸다는 걸 새삼 5일 사이에 익은 바람 냄새에서 느껴 버렸다.
앞서 걷던 젊은 부부의 이야기가 들렸다.
여자는 ' 봄 냄새가 난다'고 했고 남자는 ' 비 냄새가 난다'고 했다.
봄이면 어떻고 비면 어떠할까 봄비처럼 싱그러운 대화에 뒤따라 걷다 흘깃 웃어버렸다.
이제 곧 떠나려는 급행열차에 올라타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밤에 다정한 부부의 대화는 참 부럽고 달디단 진정제 같이 다가온다.
그만 마음이 풀어져 어찌 됐건 따땃한 밤이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집에 와서 드라마를 보았다.
챙겨 보는 것은 아니고 보게 되면 보는 거고 말면 마는 식으로 보는 중인데 그날은 유난히 끈덕지게 들러붙는 대사들이 많았다.
짝사랑하는 여자에게 '좋은 남자 만나'라는 예의 차린 거절이 먹히지 않자 ' 나는 네가 궁금하지 않다, 무슨 생각하는지, 뭘 하고 있는지, 궁금한 적이 없다'며 단념시키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여자배우 표정은 의외로 담담했는데 그 말에 가슴이 저릿한 건 내 쪽이었다.
잔인한 말이었다.
거절의 의미를 담는 말은 상처 출혈이 응당 포함된 말들이겠지만 그 말은 오래도록 곱씹어도 바래지 않고 싱싱한 생채기로 매번 피어오를 것 같은 말이었다.
우연에 기댄 연락 한 줄을 애타게 기다려본 사람 입장에선 그랬다.
한 가지 더 기억나는 장면은 이혼한 여자와 전남편과의 대화였다.
이혼하면 얼굴 보고 살지 말자 라는 남자의 말에 여자는 이혼해도 친구처럼 지낼 수 있는 거 아니냐고 했다.
한때 아무 준비 없이도 결혼할만큼 사랑한 사이였는데 우린 지쳤고 그러다 헤어지게 되었고 다시 볼 때마다 좋았던 감정이 피어날 것이고 언제였었는지도 모르게 또 상처 줄 것이기 때문에 안 보는 게 맞다 하는 그런 내용이었다.
그렇다.
한때 좋았던 사이에선 단념도 정리도 빠른 부류가 있겠지만 아궁이에 불은 꺼졌어도 온기식은 아궁이를 부여잡거나 전체를 들어낼 수 없는 부류의 사람도 있다.
두 남자 모두 냉정하게 '정리'를 말하고 있지만 같이 불지폈던 사이의 남자는
'그래도 너를 다시 사랑할까 두렵다 '라는 쪽이니 그 편의 이별을 통보받는 여자가 한순간 부러웠다.
참 뜨거운 이별 고백이었다.
그리고 난 고개가 숙여졌다.
사랑이 끝나도 한 적 없었던 것 같은 궁금하지 않은 여자 쪽에 가깝다는 걸 깨달아 버렸다.
다시 따땃한 밤은 서글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