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11일차

2016.4.15

by 사막물고기

- 올레5코스 (서연의집,마음빛그리미갤러리) -> 올레6코스(쇠소깍) : 이중섭갤러리 근처까지 / 라면먹고갈래 게스트하우스


좋은 소식은 손톱이 조금씩 자라고 있었다.
물론, 내가 아작 아작 으깨어 놓는 일련의 화풀이 대상을 능동적으로 자제하고 있는 결과이긴 하지만, 어쨌건 유연한 마음을 품게 해 손톱달이 자라고 있는 중이었다.

모처럼 달고 긴 잠을 자고 일어났다.

타인의 생활과 내 생활을 비교하며, 자신을 괴롭힐때가 있다.
이쯤 되면 결혼을 해야 할텐데, 아이를 낳아야 할텐데, 번듯한 직장이 있어야 할텐데, 직책을 달고 있어야 할텐데, 고가의 화장품과 가방을 한두개 이상은 가지고 있어야 할텐데, 등등등.
비교순환 고리에 빠져 나올 수 없다면 물리적으로라도 눈에 비견되는 전쟁터에서 떨어져 나와 보는 것도 지금은 좋다는 생각이 든다.

자기 자리가 있는 한,그 자리로 돌아가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이 할 일이 겠지만, 다른 사람들의 인생속도에 불완전한 자기 자리를 만들어 둘 필요 또한 없는 것이리라.

자신이 아닌 남의 기대에 부응하며 산다는 건 분명 무리가 된다.
기대만큼 부응해주지 못했다는 평가로 조각조각 갈라진 시간은 쉬이 회복되지 않는다.

서서히 백발로 변하며, 주름이 깊어가며, 차근차근 늙어가는 할머니가 되는 꿈을 꾸었다.

시간이 많은 어른으로 자라다 늙어가는 행복한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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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조식은 짜장밥과 콩조림,멸치볶음 반찬이었다.
푹자고 일어났다고 생각했지만, 아침 걷기는 반쯤 얼이 빠진 상태로 걷게 된다.
커피, 커피가 마시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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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미항을 지나, 위미우체국에서 짐가방의 옷가지 몇개를 정리했다.
청바지1개, 자켓1개, 상의2벌, 그동안 다녀온 곳의 관광홍보물, 충전안되는 보조배터리, 수건2개, 치약을 박스에 담아 내손동 집으로 부쳤다.
몇개 되지 않는 짐이라고 생각했는데, 가방에서 빠지고 나니 한결 가벼워졌다.

" 보내는 사람을 안적어 주셨네요 ? "
" 아, 제가 저한테 보내는 거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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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체국에서 나온후 길치 회로가 오작동을 하기 시작했다.
들어올 적과 나올적 의 방향이 흐트러 지면서, 무슨생각에선지 간세표를 볼 생각도 안하고 위미 2리 3리, 로 떠돌았다.

중간에 다시 올레코스로 합류할 지점을 생각해서 이리저리 옮겨 다녀도, 전혀 모르는 길의 연속이었다.

한참 씨름을 해서 돌아온 곳은 길을 잃었던 첫 지점 위미 우체국이었다. (한 두시간정도 떠돈것 같다)

이정표를 잃어버리게 되면, 멀리 떠돌 생각하지말고, 그 지점을 찾아가라는 단순하고 기본적인 원칙 하나를 잊고 있었다.

늘, 알고 있는데도 실수하는것 투성의 연속이다.
그래서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한다고 ,
몸이 지치니 마음도 따라 동요하곤 한다.

다시 찾은 간세 이정표를 조금 더 절박하게 눈에 담으며 5코스를 계속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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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건축학개론'에 나왔던 장소 '서연의집' 카페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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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촬영당시의 배우들 사진과, 명장면, 대사 등을 실내 디자인과 잘 어울리게 배치해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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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민의 작업실 공간이 참 멋졌다.
잘 만든 건축(집)과 잘 만든 영화의 합작이
제주 앞바다와 잘 어울리는 쉼터가 되어있었다.

예쁜 카페의 상징들 처럼 여기는 아기자기한 소품과, 장식품들이 없었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실내와 외관이 그래서 더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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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전망이 보이는 2층 테라스는 영화속 서연이 자근 자근 잔디를 밟는 장면을 생각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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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닐라라떼도 맛있었고, 헤메느라 지쳤던 다리와, 침울함도 한번 펴고 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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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연의집에서 조금 더 걸어 나가면 내일학교라는 대안학교에서 운영하는 '마음빛그리미' 갤러리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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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장밖은 제주의 일상을 보여주는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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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장안은 내일학교 학생들의 흔적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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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전시회가 정원처럼 놓여 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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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을 벗고 마룻바닥을 밟아가며 구경할 수 있었던 내부에는 김한새얼 선생님의 글과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갤러리를 지키는 직원분께서 감귤차를 내어주셨는데, 참 향긋하고 따뜻했다.

" 꼼꼼히 둘러보시네요 "
" 아, 글이 너무 와 닿아서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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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의 글을 더 읽어보라고 문집을 꺼내주셨고, 하고 싶은 말을 적어 줄 수 있는 손편지 공책도 내어주었다.
몇편의 글을 더 읽어본 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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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게 소감을 전하는 편지를 썼다.
우연한 기회에 발견하게 된 이 작은 갤러리에서 거울을 보고 쓴 듯한 글과, 맑은 사진들을 보니 위로가 되었습니다 하는 내용으로 마음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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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쏭달쏭한 제주 방언과 표준어로 풀이된 돌담을 알음 알음 읽어가는 재미가 있었던 길을 지날쯤에 키가 작고 귀여운 아주머니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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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레 코스를 본격적으로 돌고 계시다는데, 늘 혼자 걷다가 이렇게 사람을 만나 얘기하게 되니 너무 반갑다고 먼저 말을 걸어 주셨다.
그리고 길동무가 되어 5코스의 나머지 길을 함께 걸었다.
어쩌다, 올레길을 걷게 된 이야기.
혼자하는 여행의 묘미, 그래도 너무 혼자만 걷게 되니 쓸쓸했더라 하는 이야기 등등을 나누었다.
슬슬 지쳐갈 찰나, 도보의 속도를 맞추어 함께 가는 사람이 있어, 5코스의 나머지 길과 6코스도 꽤 걷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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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싶었던, 쇠소깍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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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카약을 타고 싶었는데, 한참을 지켜보아도 혼자 타는 사람이 없어 구경하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아주머니는 안탄다고 하셨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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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이어지는 5코스의 해안길은 내내 장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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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기를 하듯, 힘차게 달려와 망설임 없이 바위에 부서진다.
그 기백에 보는동안 숨이 파래지는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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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짐 줄인 캐리어는 가뿐했고, 그 동안 단련도 되었는지 제지기 오름을 오를땐 견딜만했다.
허벅지가 땅땅하게 조여오는 느낌이 마구마구 건강해질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땀 흘린 뒤에 내려다보는 작은 포구의 경치가 별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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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를 앞에 지고 걸으면서 한층 더 거무 튀튀해질 기미,주근깨 따위가 생각나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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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날엔 백두산 전경이 물에 비춰 보인다는 소천지에서 햇살에 물빛만 번쩍거릴때,
이렇게 많은 햇살을 받는것도 복된 시선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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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호텔의 잔디밭과 경관에서 부유스러운 제주의 경관을 훔쳐다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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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한가운데 집이 떠있길래 하도 신기하여 한참을 들여다 보니, 멀리서 배가 사람을 실으러 왔다.
바다 한 가운데서 무얼하고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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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산책길이라는 코스를 지나며 소정방 폭포도 보고, 폭포 아래 바다로 이어지는 물이 모여 더 큰 물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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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코스를 많이 헤맨덕에 6코스는 뭐 얼마나 걸을 수 있을까 싶었는데, 잘근 잘근 이야기를 나누며 발길을 옮긴 덕에 6코스의 절반 이상을 넘어 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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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가 정해져 있는 아주머니는 서귀포올레시장에서 저녁거리를 먹고 들어가신다고 했고, 나는 여기서 부터 숙소를 찾아보겠다고 했다.

길동무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났고 산뜻하게 헤어진다.
여행자들은 미련없는 이별을 서로 주고 받는다.

인생도 길게 보면 하나의 여정인데,
왜 모든 이별은 힘이 들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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