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16일차

2016.4.20

by 사막물고기

- 올레11코스완주 / 혼울타리 게스트하우스



가파도 민박에서 하루를 지내고, 9시25분 첫 배를 타고 나왔다.

민박비를 현금으로 주느라, 가파도에서 모슬포항으로 가는 배삯이 없었다.

가파도 여객실은, 할아버지 한분이 수기로 배표를 끊어주고 마을회관이 더 어울릴법한 작은 건물이었는데
'카드는 안돼나요, 현금인출기는 어디있나요 '하는 답답한 소리만해댔으니 참 한심스러워 보였을것 같다.

곁에 계시던 가파도 주민 할머니께서 내 배편까지 현금으로 내주셨다.

너무 감사하여, 모슬포항에 도착하면 현금 찾아서 드릴게요! 라고했는데, 인파에 섞여 잃어버리고 말았다.

할머님은 괜찮다고 하셨지만 일이천원도 아니고 오천칠백원이나 되는 돈이라 꼭 드리겠다고 약속하고선 갚을 기회를 날려버렸다.

빌지못한 잘못보다, 갚지못할 빚이 마음에 더 오래 남는다.

내가 더 드렸으면 드렸어야 했지, 홀랑 받아먹고 도망친 꼴이 된 것 같아 하루종일 마음이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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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여곡절 끝에 모슬포항에 도착하여 11코스 출발지인 하모체육공원에 도착했다.
할아버님 한분이 어디서 왔는지, 제주도 좋은지 물어보셨다.

" 네 제주도 좋아요 "
" 아가씨 사는 경기도 보다 좋수 ?"
" 네 좋아요 !"
" 허 거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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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육공원 근처 마트에서 주전부리 좀 사고 우물우물 먹으며 걸었다.

점점 혼자 여행이 편해지는 가장 큰 이유는 먹는 때와, 종류를 내 하고픈 대로 할 수 있어서 편하다.

난 많이 먹지만, 한번 걸을땐 많이 걷기도 하니까 더 갈 수 있겠는지, 힘들지 않은지 신경쓰고 걱정해 주지 않는것도 편하다.

카페에서 한번 쉴 때는 꽤 오래 쉬기도 하고, 그 틈에 여행기도 틈틈히 적어두기 때문에 대화하지 않는 시간이 편하다.

편한건 줄줄이 더 말해볼 수 있겠지만, 외로움이라는 가장 큰 반대의 이유가 줄세워 두던 편한 이유들을 부질 없게 만들어 버릴때도 있다.

오늘이 유독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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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안로로 나와 걷는 길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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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이 온통 마늘 밭으로 둘러 쌓인 길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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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 다녀야 할 길에도, 사람 한명 마주치기 힘들때, 내가 현실을 걷고 있는게 맞는지 의뭉스러워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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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레11코스는 유독 무덤, 묘비가 많다.
마늘밭 안에서도 무덤은 함께 자리하고 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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얕은 오르막이 있는 포장도로 길 가에도 묘지였다.
자손들의 생활터전 가까이에 누워 사는곳을 바라보고, 밭을 일구는 모습을 지켜보는 중이라 생각하면서 무섭다거나 기묘스럽다거나 하는 죽음의 연상적인 생각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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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슬봉을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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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슬봉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숲길을 걸었다.
좁은 흙길에 굵지 않은 나무와 풀은 사람하나 지나갈 자리를 빼고 부드럽게 메워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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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슬봉 정상에 올라, 제주 남서부 일대의 오름과 굉장히 멀게 느껴지는 바다를 보고 중간 스탬프를 찍었다.

민박집에서 아침 제주 뉴스를 볼때 오늘 저녁부터 비가 온다고 했다.
아직 어두워질 시간이 아닌데도, 군데 군데 뿌옇게 물든 하늘을 보니 걸음을 재촉해야 할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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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가는 길 부터는 지역 최대의 공동묘지가 있는 곳이라는 설명과 함께 많은 묘지를 지나쳤다.
밭에서 산으로 산에서 길로, 참 많은 사람들이 묻혀 있었고, 아무 연고 없는 무덤 사이를 담담히 지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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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난주 마리아의 묘까지 가는길도 작은 평수의 청보리 밭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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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게는 마늘밭이었다.
태어나서 제일 크고, 많은 마늘쫑들을 본 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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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의 묘를 지나 신평사거리까지 가는 밭 가운데는 알싸한 냄새가 나면서 양파 망작업을 하는 현장도 볼 수 있었다.

대부분, 아저씨나 할아버님들이 먼저 말을 걸어주는 편인데 이쯤에선 아주머님 한분이 여자 혼자 다니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꾸물거리는 날씨 탓일 거란 생각도 들었다.

곶자왈을 먼저 지나왔었다면 끄덕끄덕 거렸을수도 있겠지만 혼자 다니고 싶지 않더라도 별 수가 나오지 않는 상황이라 듣고 흘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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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모를 묘목과 농작물이 많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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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 밭과 땅은 황망하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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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 덩쿨 따위가 마구 엉클어져 수풀같이 어수선하게 된 곳을 제주어로 '곶자왈 ' 이라고 한다.
화산이 분출할때 점성이 높은 용암이 크고 작은 덩어리로 쪼개지면서 분출하여 매우 두껍게 쌓인곳이라고 한다. (제주올레 서귀포시 가이드북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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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서, 바닥에는 이렇게 돌의 다듬어지지 않은 면처럼 된 길이 많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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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친 느낌의 숲의 폐부가 그대로 보이는 곳이었다.
마치 고생대의 원시림으로 들어온 것 처럼 눈을 돌리면 공룡이 나타날것 같은 느낌을 주기도 했다.

사방으로 뻗은 갈림길들이 많았다.
올레 이정표가 생명줄이었다.
흐려지고 있는 날씨 탓이 아니어도 곶자왈은 쉬이 어두워지는 숲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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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날듯 끝날듯 끝나지 않는 곶자왈의 늪에 빠져 맴돌고 있는 것 같았다.
신비로운 곳이었지만,
땅은 거칠고,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 없는 여정은 힘들었다.

바람이 스치면 바스락 거리는 갈대소리와, 느닷없이 뛰쳐나가는 꿩, 스스스스스 하면서 누군가 쫓아오는것만 같은 소리들이 겁을 주었다.

함께봐야 좋은곳이 있고, 혼자봐도 좋을곳이 있다 한다면, 곶자왈은 함께 가서 따로 또 같이 숲을 즐겨야 안정을 갖추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정말 비가 쏟아지긴 할건가 보다.
거친 바람 소리가 먼저 알려 주고 있다.

곶자왈의 지면이 아직도 발바닥에서 느껴지는것 같다.
이게 다 비 쏟아지기 전에 숙소를 잡고 쉬려는 생각에 무리한것이라 하겠지만, 어느 시점부터 겁을 좀 먹었었나 보다.
부지런히 도망쳐 왔다는게 더 맞을지 모르겠다.

슬슬 돌아갈 티켓을 알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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