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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막물고기 Jun 08. 2016

또 오해영과 또 엄마

서른하나 마마걸의 주저리 


                                                                                                                                                                                                                                                                                                                  

요즘 또 오해영을 열심히 보고 있다.


내 기준의 '열심히'는 회차 빠지지 않고 순차적으로 보는 정도 인데, 

오해영과 박도경 캐릭터의 대한 분석은 

내가 하기 보다 남이 해놓은걸 읽는것이 더 재밌었다.


나 또한 그렇고 주변인들도 그렇고, 세상인을 모티브로 박아 놓은 작중의 캐릭터들도 그렇듯, 

사람은 참 여리고, 연약한 존재라고 느끼는 것이 

타인에게 거절당한 상처는 참 끈질기게 짊어지고 아파한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박도경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상처를 제대로 치료 받은 적이 없어 감정불구자가 된 것이라고, 

그에 반해 오해영은 엄마에게 울고 웃고 떼를 쓰며 감정을 드러내고 치유를 받는쪽이라고 말이다.


도경보다는 해영이가 감정에 솔직한 사람이라 생각했었는데, 

비빌 구석 있는 자와 없는 자의 차이라고 생각해보면 도경은 참 짠하다.





연애할적 남들 흔하게 속삭이는 사랑한다는 말을 듣기가 참 애달았던 사람중 한명으로서 

연인에게 마저 말을 아끼고, 마음을 아끼는 남자는 신중함이란 가면을 둘러 쓴 위선자들이라고 생각했었다.


냉정하게 구별하면 도경은 해영을 사랑하지만 표현하지 못하는 귀책사유와 트라우마가 있는 것이고, 

내 과거의 신중한 남자는 그 사람 말대로 사랑하는 감정이 뭔지 모르겠어 정도의 여자가 나였던것 뿐이다.


이제는 심플하게 받아 들일 수 있는 덜 사랑함의 결과를 그때는 참 많은 반전을 소망했었다.


이 세상에 많고 많은 사람 중 고작 한명과 인연이 끊어졌을 뿐인데, 

마치 많은 사람들에게 호감을 사지 못할 사람이란 인증서를 

받아든 것 마냥 절망스러웠고, 다시 누군가와의 사랑앞에 설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도경에게 잠깐만 만났다가 헤어지더라도 지금은 만나보자 매달리는 해영의 마음은, 

한 남자에 대한 맹목,집착이라기 보다 

'나 좀 살려주세요 ' 에 더 가깝다고 느껴졌다.


해영에겐 그래도 엄마가 있었다.


서른 넘은 여자가 엄마에게 아이 처럼 울며 자신의 연애사를 고하고 훈수를 두는 엄마와 딸 사이는 

나의 유일한 가족이자,친구이자,언니이자,동생같은 모든 역활을 담당하고 있는 나의 엄마와 겹쳐 보이게 했다.


이 드라마의 부제는 엄마와 해영이로 지어도 어색하지 않을만큼, 같은 세대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함께 등 두드리며 나이를 먹는 모녀의 잔정들을 많이 보여준다.


세상 누구보다 잔인하게 비난하고 깎아 내리다가도 손길 하나 없는 어둠에 내쳐졌을땐, 

가장 가까운 곳에서 눈물을 닦아 주는 사이.


나의 엄마는 해영의 엄마보단, 조금 더 신경질적이고, 

악다구니스런 강인함으로 딸을 지켜주는 사람은 아니지만,

제일 못났을때부터 그나마 볼만 했을때의 내 모습 모두를 통일시켜 사랑해주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가끔 " 여자는 ~ 해야 한다니까 " 하면서 고리타분한 소리를 해도 

딸이 조금 더 사랑받길 원하는 조바심에 나오는 말임을 안다.


다만 내가 이제는 해영이쪽이 아니라 도경이쪽에 가까운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글쎄, 이제는 내가 싫대 엉엉 울며 요란을 떨던 나는 선사시대 환생전 인물인것 마냥 까마득하고, 

서운해도 그렇지뭐, 슬퍼도 그렇지뭐, 사람관계가 다 그렇지뭐 하며 산다.


사랑이 뭐라고, 연애가 뭐라고, 다 죽어갈듯 그려 놓는 드라마나 

이미 한 풀 죽을동 살동으로 꺾여버리고 난 뒤 잔챙이 같은 나의 삶을 나란히 위아래로 늘여 보면 

가운데 '엄마'라는 사람이 버티고 있었다.


엄마 때문에 살고 엄마 덕에 산다.  

엄마 없이 행복한 여자가 되길 바라는 딸들의 잔인한 소망을 가장 잘 이해해줄 것도 엄마다.

나도 내 딸에게 비빌 언덕을 잘 만들어 줄 수 있을까, ? 

해영의 엄마와 우리 엄마를 보며 생각하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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