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그랬을까?
아들이 대구에 있는 종합병원에서 60일있다가 세브란스 병원으로 전원 했다. 그리고 바로 수술해서 생후 80여 일 만에 처음으로 일반 병실에서 함께 있을 수 있게 되었다.(그전에는 신생이 중환자실)
비록 위에 구멍을 뚫어 호스로만 우유를 줘야 했지만 오랜 금식에서도 해방이었다.
첫아이여서 어린아이를 혼자 보기가 겁났다. 시어머니와 함께 병원 생활을 했다. 아이는 분유를 먹이면 되지만 어머님과 나의 식사는 알아서 해결해야 했다. 내 기억에 보호자 식사는 의료보험이 안돼서 한 끼에 8000원쯤 했다. 나와 어머님 ...둘이면 한 끼에 16000원이다. 병원 밥은 신청하지 않았다.
대구에서 올라온 터라(사돈의 8촌까지 서울에 사는 사람 전무) 우리 밥을 싸올 사람도 없었다. 매일 편의점에서 김밥이나 라면을 사 먹을 수도 없었다. 글을 적다 보니 병원 지하 식당 밥을 포장해와서 먹어도 되는데 왜 그 생각은 안 했을까? 싶다. 그렇게 찢어지게 가난하지도 않았는데 왜 그렇게 궁상이었을까?
그런 나에게 떠오른 것은 대학 식당 밥이였다. 신촌 세브란스 병원과 연세대가 붙어있었다. 밥때가 되면 나는 락앤락 통 두 개를 비닐봉지에 넣어 연세대 식당으로 갔다. 그때 당시 국밥을 제일 많이 샀는데 국밥이 2000원이 안되었던 기억이 난다. 2500원이었나? 10년도 더 넘어서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그 국밥을 2인분 사도 되련만 1인분만 사면서 늘 식당 아주머니에게 "밥 많이 주세요."라고 했다. 그렇게 식판에 받아온 국과 밥 그리고 조금 나오는 김치(김치는 셀프였는 것 같기도 한데 기억이 안 난다. 아무튼 조금이었던 것 같다)까지 살뜰히 락앤락 통에 담아 들고 병원으로 되돌아왔다.
당연히 간식 같은 건 사지 않았다. 언젠가 병원에서 강남역에 있는 곳(건강보험 안되는 외국에서 직수입한 약을 취급하는 곳)에 가서 약을 사 오라고 해서 나간 적이 있다. 그때 피자 한판을 사들고 왔던 것이 전부이다. 어머님이 참 맛있게 드신 기억이 난다.
그렇게 20여 일 지내다 대구로 내려왔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인데 어머님은 그때 5kg이 빠지셨단다. 나 역시 내 인생의 최저 몸무게를 기록했던 것 같다. (병원에서 입던 운동복 바지가 흘러내렸으니)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병원에 입원했으니 내가 산후조리를 했을 리 만무하다. 뭘 입에 넣으려다가도 아이는 신생아 중환자실에서 우유 1cc를 못 넘기는데 싶어서 먹을 수가 없었다.
그래...
돈이 없어서 돈을 아끼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들에게 미안해서 궁상맞은 짓을 한 것 같다. 아들은 입도 아닌 위루관으로...그것도 아주 제한적으로 분유를 섭취하는데 그 옆에서 엄마가 게걸스럽게 밥을 먹을 수는 없지 않은가?
지금이라도 그랬을까?
인 먹히더라도 억지로 먹어야겠다. 그땐 젊어서 안 먹어도 버텼지만 지금은 안될 것 같다. 먹어가며 돌봐야겠지...
음식을 입으로 꼭꼭 씹어 먹을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행복인지...
온 가족이 모여 밥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그것을 하지 못하게 되어봐야 느낄 수 있다.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 중 정말 당연한 게 하나라도 있을까?
그래서 성경에 "범사에 감사하라."라는 말이 있는 건 아닐까?
아들이 밥은 안 먹고 과자를 먹겠다고 고집을 부려도 그때 당시는 실랑이를 벌이고 속상해하기도 하지만 그 감정이 오래가지 않는 것도 그때문이다.
1. 과자를 먹겠다고 말로 할 수 있다.
2. 과자를 자기 손으로 집을 수 있다.(비록 과자 봉지는 잘 못 뜯지만)
3. 과자를 씹을 수 있다.
4. 과자를 넘길 수 있다.
5. 과자를 소화시켜 대변으로 내보낸다.
이 모든 것이 절대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걸 나는 경험했다. 지금도 주변에서 많이 본다. 과자를 먹겠다고 말할 수 있도록 언어치료를 받고 자기 손으로 집을 수 있도록 작업치료를 받고 씹어 넘길 수 있도록 연하 치료를 받고 소화 시켜 대변으로 내보내지 못해 사흘에 한번 관장을 하는 아이들이 주변에 매우 많다.
감사하자.
숨 쉬는 것조차...
한자리에 모여 투닥거리는 것조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