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일의 모순/23회/세상에 나온 계절

by 모순


새벽 알람을 뒤로 하고 누워있는데

부엌에서 소리가 났다.

"예약 취사를 시작합니다."


뭐지, 밥을 얹혀놓지 않았는데

밥통이 고장 났나 하며 그쪽으로 향했다.

밥 짓기가 시작된 밥통 옆에는 미역국이 한솥 있었다.


아, 그제야 상황이 이해가 갔다.

전날 밤 나는 일찍 자고

남편은 늦게 들어와 보질 못했는데

밤에 일어난 일이구나.


내가 먹고 싶어 했지


고맙다는 내 말에 그가 말했다.

큭큭 웃으며 함께 생일 아침상을 먹고 나니

몸도 마음도 따뜻했다.


한여름 너의 생일이 오는구나, 우리 봐야지


오랜 친구Y가 멀리서 왔다.

미역국을 데우고 간단히 저녁상을 차렸다.

보고 싶은 누군가를 기다리며

하는 밥차림에 설렘이 따라왔다.


친구와 함께 밥을 먹고

내가 좋아하는 동네 산책길을 걷고

마사지 까페에도 갔다.


Y는 아기에서 어린이로 훌쩍 커버린

준이 모습을 보고 신기해했다.

아이 얼굴에 내 모습이 있다고 했다 .


준아, 너희 엄마는 엄청 재밌는 사람이야.


친구가 준이에게 해준 말을 듣고

다시 큭큭 웃음이 나왔다.

웃기다, 재밌다는 말을 좋아한다.

'재미'는 나에게 중요한 가치인데

내가 쓰는 글은 '재미'가 없는 것 같아

고민이라고 친구에게 말했다.


쿵짝깔깔 다시 농담섞인

수다를 주고 받으며 알았다.

대화의 재미는 함께 만들어

가는거구나.


나를 재밌게 만드는 건

내 앞의 그 사람이었다.

야한 농담부터 재태크, 꿈까지

종횡무진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있어 다행이다.


준이도 나처럼 Y의 매력에 푹빠졌는지

친구가 가고 나서 많이 울었다.

Y이모가 가서 준이도 하늘도 슬퍼

운다는 내용으로 그림 일기를 그렸다.

한참을 몰입하다 다 쓰고 다 울었는지

아이는 개운한 표정으로 내게 와 말했다.


기쁘게 살자 결심했어요.


준이의 결심을 들으며

얼마전 정주행을 끝낸

드라마 '그해 우리는' 속 대사가 떠올랐다.

내 마음에 들어와 메모했던 대사다.


내 인생 별거 없다고 생각했는데
꽤 괜찮은 순간이 항상 있었어
내 인생을 초라하게 만든건 나 하나였나봐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건

꽤 괜찮은 일상의 순간과

함께 그것을 나누는 시간이다.

내 인생을 초라하다 혹은 멋있다

해석할 수 있는 선택

나에게 달렸다.


순간이라는 점을 기록으로 이어

선을 만드니 보인다.

지난주에 있었던 꽤 괜찮은 순간들

선을 붙잡고

나도 준이처럼 기쁘게 살자 결심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