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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un mu Mar 17. 2023

지나간 나의 사람들

감사합니다. 덕분에 배웠습니다.






어릴 적, 난 남들에게 보이는 엄마의 친절에 가끔씩 불만이 생긴 적이 있었다.

'뭘 저렇게까지 해..'라고 해야 하나?

내 기준으로 가끔 엄마의 친절은 과해 보였고 이해도 안 되었다.

지금은 이제 이해가 된다에 가깝다.

생각해 보면 나에게도 친절한 사람들이 있었으니까 말이다.


첫 번째로 기억나는 사람은 사람들이다.

얼굴도 키도 그 주위의 모든 게 생각나지 않는다.

하지만 따스함은 여전히 기억난다.

때는 아마도 내가 초등학교 4학년쯤.

핸드폰이란 게 없던 그 시절에 엄마에게 전화를 하려면 공중전화였다.

시내에 산 게 아니고 시내에서 더 들어간 작은 동네에서 자란 나는 학교를 시내로 다니면서 엄마와의 연락은 필수였다.

그날은 무슨 이유로 전화했는지도 기억이 안 난다.

다만 이상하게도 매일 이용하던 공중전화박스가 나랑 안 맞았나 보다.

엄마와 통화를 끝내고 문을 열어 나가려는데 문이 열리지 않았다.

안에 갇힌 나는 그 자체가 공포였다.

대낮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이래도 저래도 문이 열리지 않자 통곡을 하며 울고 있었다.

그때 내 기억의 색은 검정이다. 놀라 아무것도 안 보였던 것 같다.

순간 문이 열리면서 교복을 입은 언니들이 "괜찮아?" 하며 안아주었다.

대답도 못하고 어깨가 끄억 끄억 거리며 고개만 끄덕일 뿐 진정이 안될 뿐이었다.

내가 조금 울음이 그칠 때 언니들이 다독이며 조심히 가라고 해줬고 난 몇 분 뒤에 온 엄마랑 만나게 되었다.

내가 4학년이고 당시 학교 교복에 대해 잘 몰라 중학교 교복인지, 고등학교 교복인지도 구분도 안되었다.

그래도 언니들이 중학생이면 나보다 최소 세 살 위, 고등학생이면 최소 여섯 살 위라고 생각을 하며 내가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계산을 했던 것 같다.

'내가 중2니까 그 언니들은 어려도 고2겠지?' 이렇게 말이다.

몇 명이었는지 기억도 안나는 그 언니들은 놀라 울고 있는 어린 여자아이에게 따뜻함과 안전함을 주고 갔다.



두 번째로 기억나는 사람은 동네 언니이다.

신기하게도 친분이 전혀 없는 동네 언니다.

어른들끼리는 서로 알고 지내시지만 언니와 나는 고등학교만 같은 학교로 다니고 말 한마디 안 한 그런 사이.

그 사이에 용기와 배려를 느꼈다.

때는 겨울 어느 날의 하굣길. 시내에서 30분을 달려야 도착하는 우리 동네로 가는 버스.

그 30분 사이에 눈이 어마어마하게 쏟아졌다.

지금은 아이를 키우느라 일기예보는 핸드폰으로 필수로 보는데 그때는 TV로 뉴스를 보지 않는 이상 일기예보 볼 일이 얼마나 있었겠나.

게다가 젊고 젊어 한 겨울에 코트와 내복없이 교복만 입고 다니던 내가 우산을 챙겼을 리가..

하차 후 조금 더 걸어야 하는 우리 집이기에 앞으로 나섰다.

뽀득뽀득 무섭게 내리는 눈을 밟으며..

그러다 누군가 내 옆에 있는 것 같은 느낌에 옆을 보니 언니가 우산을 쓰고 "같이 가자" 했다.

집이 가까웠는데 우산을 가지고 온 언니가 나에게 먼저 손을 내민 것이다.

여기까진 참 아름답다. 하지만 배려가 부족했던 나는 "괜찮아요" 하고 앞장서서 집으로 향했다.

망할.. 바보, 멍청이..

둘이 걷는 그 거리가 어색하더라도 "고맙습니다." 한마디면 되었을 것을..

나보다 언니더라도 한 살 더 먹었을 어린아이인데 말 한마디 안 한 동생에게 같이 가자라고 말한 것 자체가 커다란 용기였을텐데 말이다.



지나간 나의 사람들.

너무도 감사하고 또 미안한 나의 사람들.

친분을 유지하거나 연락을 하진 않지만 나에겐 잊지 못할 한 순간의 사람들.

이들의 친절과 배려에 내가 답을 하진 못했지만 그 덕분에 내가 누군가에게 친절과 배려가 되려고 하고 있다.

누군가를 달래줄 수 있고 고맙단 소리를 듣지 않아도 괜찮기도 한 그러한 날들을 보내고 생각이 나면 감사해하며 그렇게 오늘도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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