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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오십 Feb 08. 2024

은화 이야기.

1부. 청년 은화.


은화의 언니는 금화다. 은화의 아버지가 금융계에 종사하는 것도 아니고, 경제에 뛰어난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오빠의 이름이 태호인 것으로 보아 ‘딸은 남의 집 재산이다’,를 빗대어 첫째 딸 이름은 금화, 두 번째 태어난 딸 이름은 은화라고 지은 것이리라.


*


고등학교를 마치고 은화는 곧장 보험회사에 취업해서 정문을 만났다. 정문은 싹싹하고 자세가 꼿꼿한, 그런 은화에게 관심이 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문과 은화는 사내 커플이 되었고, 어느새 28년 차 부부가 되어간다. 초등학교 선생님이 된 아들 정우, 곧 대학을 졸업하는 딸 정현. 남들이 보기에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


은화는 매일 아침 6시 반이면 눈을 뜬다. 밤 새 돌려둔 세탁물을 꺼내어 건조기에 넣고, 건조기에 넣으면 안 되는 옷들은 따로 분류해서 건조대에 널어둔다. 일곱 시면 정문이 일어나 거실 창문을 연다. 맑은 아침 공기가 집안으로 들어오고 정문은 현관 앞에 배달 온 우유와 신문을 집어든다.

정문이 고고히 책상 앞에 앉아 뉴스를 읽고 있을 때, 은화는 아침밥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오늘 아침은 미역국이다. 시간이 없을 때 가장 빠르게 할 수 있는 음식 중 하나다. 북어를 찢어 들기름에 볶고, 그 사이에 불려둔 미역을 가위로 잘게 잘라 넣는다. 고소한 냄새가 올라오면 물을 붓고, 다진 마늘, 소금으로 간을 한다. 어제 밥통에 예약해 둔 쌀밥이 취사단계에 이르고 있다. 미역국은 팔팔 끓도록 올려두고, 냉장고에서 반찬을 꺼내 덜어 담는다. 숟가락과 젓가락 4쌍을 수저 받침대에 단정히 올려두고, 이제는 자신이 씻을 차례다.


욕조 앞에 허리를 90도로 꺾어 샤워기를 머리에 갖다 댄다. 차가운 물줄기가 두피를 적신다. 이내 뜨끈한 물이 나오자 물을 금세 닫고, 샴푸를 한 번 짜서 머리카락에 빠르게 비벼낸다. 거품이 충분히 나면 두피를 손끝으로 시원하게 마사지한다.


정우가 일어났는지 화장실 맞은편 방문이 열린다.

“엄마, 내 양말이 안 보여요. 내 검은 양말. 나 오늘 상갓집 간단 말이야.”

정우는 나이가 스물여섯이 됐는데도 엄마에게서 양말을 찾는다. 그도 그럴 것이 정우는 제 손으로 살림을 해본 적이 없다. 자취한다고 6개월 나갔다가 다시 돌아온 것도, 집에서 관리받고 사는 게 편하다는 걸 깨달아서 그렇다고 한다.


“엄마 머리만 감고 찾아줄게. 일단 밥 먹고 있어.”

은화는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줄기 소리에 정우가 하는 말이 정확히 들리진 않지만 아침에 자신을 찾는 이유는 경험으로 알고 있어서 자연스럽게 대답한다.


머리를 감고 나와서 세탁 건조기 안에서 나온 검은색 양말을 소파 위에 둔다. “정우야, 소파에 놨으니까 맞는지 한번 봐봐.”

다시 현관 앞 거울 앞에 서서 드라이기로 머리를 빠르게 말린다. 이십 대 때는 긴 헤어스타일을 고수했었는데 지금은 짧은 단발이다. 머리카락이 짧으면 머리를 말리는 것도 수월해서 다시 일을 하기 시작하면서 은화는 머리를 짧게 잘랐다.


정문과 정현은 어느새 식사를 다 마쳤고, 정우 역시 밥을 거의 다 먹어간다. 은화의 밥만 덩그러니 놓여있다. 은화는 일어서서 식사를 한다. 앉을 새도 없다.

밥을 국에 말아서 빠르게 입으로 밀어 넣는다. 5분도 되지 않아 밥을 다 먹은 은화는 곧장 앞치마를 두르고 손에 고무장갑을 낀다. 빠르게 설거지를 한다. 책상도 닦는다.


정문은 곱게 접힌 채 침대 위에 놓인 자신의 옷들을 장롱에 정리한다. 그리고 오늘 입을 옷을 고른다.

정우가 나간다. “나 다녀올게요! 나 오늘 늦는다?”

정현도 나간다. “ 나 오늘 아르바이트 때문에 늦어! 둘이 저녁 식사 하세요!”

옷을 멀끔히 갈아입은 정문은 읽던 신문을 마저 읽는다.


”은화야. 아래서 기다릴게. “


은화는 화장실에 가고 싶지만 그럴 새가 없다. 여덟 시 반까지 출근하는 건 자영업자로써 자신과 약속한 일이다. 그래서일까 은화는 방광염도 자주 걸렸었고, 현재는 변비를 앓고 있다. 아무튼 은화는 오늘도 출근을 해야 한다. 왜냐하면 일을 하는 것이 좋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엄마역할, 아내역할 다 하며 정신없이 사무실로 출근해 사회인 역할까지 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은화는 몸이 열 개라도 모자라다. 최근에는 은화의 아버지 의수가 뇌졸중으로 쓰러져 있으므로, 딸 역할까지 해내야 한다.


*


정문이 손에 12입 오렌지주스를 들고 은화네 집을, 더 정확히는 은화의 부모 의수와 은영을 찾아뵈었을 때를 기억한다.


“우리 집에 쓸모도 없는 애 데려다가 살림하라고 하면 제대로 할까 모르겠네. 그래도 김서방 밥은 안 굶길 거야.”

은화는 엄마가 쓸데없는 소리를 한다고 중얼대면서 낮고 커다란 식탁 위에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된장찌개를 내려놓는다. 정문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오히려 은화를 추켜세운다.

“아니에요, 은화가 귀하게 컸구나. 자세도 똑바르고, 윗사람들에게 예의도 바르고, 아랫사람들에게도 얼마나 다정하고 친절한지.”

능글맞은 대답에 만족했다는 듯, 의수는 큼큼, 목을 가다듬고 사위의 말에 기분 좋게 대답한다.


“사위는 말도 잘하네. 아주 이쁨 받겠어?”


은화는 속으로 생각한다. ‘내가 귀하게 자랐으면 너한테 시집가겠어?’… 이렇게 말이다. 다만 어른들에게 능글대는 성격, 그리고 잘생긴 얼굴. 이것만으로 은화는 정문과 결혼을 하기로 했다. 어차피 언젠가 하게 될 결혼이라면 그냥 잘생긴 사람과 결혼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거니, 하고.


*


정문은 자신을 10분이나 차 안에서 기다리게 만든 은화를 타박한다.


물론 음식물 쓰레기 처리와 분리수거는 은화의 몫이다. 정문이 차를 타고 은화를 데려다줄 준비시간을 절묘하게 맞추는 날이면 정문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다만 오늘처럼 10분이 늦으면 “당신이 10분 기다리게 하면 내 10분, 당신 10분 합해서 20분 손해 본 거야.” 이런 식의 말을 했다.


*


정문은 한탄한다.

“우리 집은, 내가 식사준비 해. 뿐만 아니라 설거지도 한다고. “


부부동반 모임자리에 가면 한탄과 섞어 내심 ‘나는 깨어있는 남편이다.’라는 이미지를 보이고 싶은 건지 정문은 이런 말을 한다.

사실상 정문이 밥을 하고 설거지하는 건 해에 10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이기에 굳이 따지자면 은화가 해야 할 한탄을 정문이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은화는 그런 정문을 타박하기보다 그렇다고 시인한다. 그러면 친구들이 ‘우와, 은화 씨는 되게 곱게 사시는 구나. 그래서 아직도 아름다우시네.’라고 말한다.


은화는 그런 정문이 안쓰럽기도 하다. 과거 사업이 잘 나갔을 무렵엔 자신이 가장으로서 노릇한다는 자신감에 차 있던 시절을 보아왔기에, 현재로서는 가사도, 돈을 버는 것도 모두 은화가 중심이 되어있기에 정문의 자존심을 세워주고 싶어서 그렇게 행동한다.


*


정문은 자신이 갱년기를 겪고 있다고 느낀다.


대뜸, 은화에게 화를 냈다.


“당신, 밥 안 먹을 거야? “


은화는 갑작스레 꽂힌 이 문장의 의미를 해석하느라 머리가 빠르게 돌아간다. 하지만 그전에, 정문은 자신의 문장에 대한 주석을 달아 그 해석을 쉽게 도왔다.


“당신이 밥 좀 차려줄 수 없는 거야? 남자가 밥을 하면, 주방에 들어가면 되게 자존심 상한다고.”


벌써 12시가 지났고, 곧 한시를 넘어가면 또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지금 밥상을 차려야 한다는 뜻이다. 이제까지 한 사람이 밥을 준비하면, 다른 한 사람이 설거지를 도맡았으므로 은화는 지금 자신이 일을 끝 마치지 못했으므로 정문이 밥을 준비하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밥은 당연히 내가 차릴 수 있죠, 근데 지금 일 때문에 밥 차리기가 그래서 그런 건데.”


“당신 부모님, 그러니까 어머니는 평생 아버지 병원생활하실 때까지 손수 밥해드렸는데, 내 신세가 말이 아니다.”


정문은 웬 20세기말 가부장 사회에서 할 법한 이야기를 샐쭉하게 꺼낸다. 이 말은 정문 입에서 가끔 듣는 이야기지만, 꽤 오랫동안 그의 머릿속에서 자리 잡힌 생각임을 알 수 있었다. 정문 자신도 이 말은, 왠지 꺼내면 안 될 것 같지만 자신도 모르게 가득 차오른 생각을 막지 못해 흘러나오듯이 감정과 함께 삐져나왔다.


*


정문은 그 말을 수습할 시간을 놓쳤고, 은화는 어이가 없다.


28년이 지난 지금도 은화는 속으로 생각한다. ‘내가 똑똑했으면 너랑 결혼했겠어?’


*


은화와 정문은 결혼한 지 일 년 조금 지나서 자기 사업을 하기 위해 둘 다 회사를 그만뒀다.


처음 여섯 달은 수입이 전혀 없었다. 가끔 후회되기도 했지만 인테리어 가게를 차린 지 6개월이 넘어가고 종종 직장인의 월급 맞먹는 돈을 하루 만에 벌기 시작하면서 대부분의 시간은 나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처음에 정문만 회사를 나가는 게 어떻냐는 은화의 말에, 정문은 은화에게 말했다.


“은화야, 우리가 먹고 살만큼은 그래도 돈 벌 수 있어, 우리도 우리 일 해봐야지. 안 그래? 내가 너 손에 물 안 묻히게 해 줄게.”


*


정문은 여러 아이디어를 쏟아서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사업 상 인맥을 만드는 데에 집중했다. 첫 일 년은 느낌이 좋았다. 인테리어 사업을 시작했고, 의뢰인들의 아파트 실내 인테리어를 수주받아 계약을 진행시켰다. 은화는 이 모든 과정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다만 집에서 출퇴근 시간이 들쭉날쭉한 정문의 아침밥, 저녁밥을 차렸다. 지쳐서 쓰러질 듯 들어오는 정문을 은화는 반갑게 맞이했다. 식탁 앞에 앉은 정문에게 따뜻한 밥 한 공기 퍼 나르고, 뒤이어 달래 된장국을 데워 정문의 앞에 놓아주었다. 자신을 가장 걱정해 주고 응원해 주는 은화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문과 은화는 늦은 저녁을 마치고, 샤워를 하고 잠에 들었다.


*


 은화의 ‘월급날’은 한 달에 한 번씩 반복되었다. 사업의 가세에 따라 그 액수가 들쭉날쭉했다. 처음엔 많은 액수를 받으면 그 돈을 모두 다 써버렸지만, 뒤이어 많을 땐 조금 아껴 쓰고, 적을 땐 모아둔 돈을 융통하는 기술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가정주부로 살아가는 것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은 없었지만 집안 살림을 잘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가끔 완벽히 통제되고 있는 집을 볼 때면 기분이 좋았다.


 정문의 아침밥을 차려주고 남은 오전시간에 청소기를 돌리고, 빨래를 하고, 반찬을 만들어두면 오후 시간에는 시간이 비었다. 직장을 다닐 땐 이 시간에 이런 자유를 갖지 못했는데, 오후 두 시에 햇빛이 드는 창 앞에 앉아 식물들에 물을 주고 있노라면 그 시간이 달콤하고 만족스러웠다.


 종종 정문은 은화에게 세련된 취미를 기르라고 ‘보너스’를 주기도 했는데, 그런 날이면 택시를 타고 백화점에 가서 향수를 고르거나, 쁘띠 스카프를 사서 목에 두르고 거울 앞에서 몸단장을 했다. 백화점 식품코너에서 산 신선한 소고기로 소불고기를 하고 유부초밥을 만들고, 잡채를 만들었다.

 일을 마치고 들어온 정문은 집안에 배어있는 따뜻한 음식냄새를 맡는다. 뒤이어 복도 끝에서 흰 폴라티와 실크 미디스커트를 입은 은화가 보인다. 외투를 벗어서 은화에게 건네고, 식탁 앞에 앉는다. 정문은 집안에서 은근히 느껴지는 자신의 권력, 능력, 역할에 스스로가 아주 자랑스러워진다. 정돈된 집, 누가 봐도 아름답고 세련된 아내, 항상 따뜻하게 덥혀진 집밥..


 정문은 사업 파트너가 선금으로 지불한 계약금의 반을 은화에게 당당히 내민다. 은화는 이런 큰돈을 처음 봐서 깜짝 놀라 동그랗게 눈을 뜨고, 정문은 은화가 귀엽다는 듯이 웃는다.

 ”은화야. 고생이 많아. 밥 하느라 힘들지? 맛있는 밥 해줘서 고마워. 내가 앞으로 더 잘해줄게. “


 정문은 은화의 고운 손을 어루만지며 이 손을 언제까지고 곱게 유지할 수 있도록 해야겠다고 다짐한다. 아내의 고운 손, 세련된 옷차림, 홍조를 띤 맑은 피부가 자신이 일하는 이유이거니, 그렇게 정문은 자신의 사회적 입지를 다지겠다는 열망과 동시에 더 큰돈을 벌어들이겠다는 욕망을 되새긴다. 은화는 돈을 벌 필요가 없다. 자신이 벌어다 준 돈으로 은화는 편안히 놀고먹으면 된다. 정문은 무화과 같은 은화의 입술을 본다.


*


정문과 은화는 결혼 2년 뒤에 아이가 생겼다. 정문과 은화 둘 다 닮지 않아서 누구를 닮은 건지 의아했지만, 그 아이가 인생의 새로운 감각과 세계를 열어줄 것임을 직감하고 있었다. 은화는 이제 시간을 쪼개어 썼다. 지난 2년 간의 자유가 오늘을 위한 휴식이었다는 듯이, 은화의 오늘은 빼곡했다. 울어대는 갓난아이를 어르고, 시도 때도 없이 찾아대는 젖을 물리고, 그러면서 하루종일 밖에 나가서 들어오지 않는 정문을 위해 밥을 지어두는 일까지. 첫 아이를 가지자고 계획할 때만 해도 정문은 사업을 안정화시키고, 규모를 더는 키우지 않겠다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말과 다르게 정문은 점점 사업을 확장해 나갔다. 정문과 은화는 40평형 아파트로 이사했다.


정문은 여전히 집에 돌아오면 어김없이 현관문 앞까지 아이를 안고 나와 자신을 맞이하는 은화를 사랑했다. 따뜻한 집, 온기, 살캉한 어린아이의 살냄새까지. 은화는 첫 아이를 낳고 많이 수척해졌지만 여전히 사랑스럽고 아름다웠다. 그가 좋아하는 꼿꼿한 자세를 잃지 않았고, 그런 기품 있는 모습을 여전히 좋아했다. 정문은 두둑한 봉투를 저녁식사 전에 건넸고, 은화는 담담히 건네받았다. 정문은 은화에게 입 맞췄고, 은화는 받아들였다.

주방에는 젖병을 소독하기 위한 소독기가 놓여있고 현관에는 스타일러가 설치되어 있다. 주방에서 시작되어 안방으로 향한다. 안방 문 앞에는 아기 옷장이 있다. 첫 아이를 축하하기 위한 선물이 넘쳐나서 보관할 장소가 필요했다. 귀여운 꿀벌 옷, 카디건, 외투, 양말, 가제 손수건… 은화는 그 모든 선물을 세척하고, 단정히 접어 옷장에 보관했다. 안방은 월넛나무로 짜인 라지 킹사이즈 침대와 흰색 반투명 커튼, 미색 조명이 설치되어 있다.


*


첫째 아이가 태어나고 그다음 해에 둘째가 찾아왔다. 둘째 아이는 정문을 빼닮아 있었다. 정문은 여전히 은화에게 넉넉한 ‘용돈’을 줬다. 아이들이 복덩이인 건지, 정문의 사업이 너무나 잘 풀리고 있었다. 하지만 부모가 된 은화는 너무나도 혼란스러웠다. 아이를 키워본 적이 없고, 무엇보다 당장 친정의 도움을 받고 싶어도 친정은 150km가량 떨어져 있었다. 은화는 설거지를 하다가 헐렁하던 고무장갑이 딱 맞게 끼워지는 걸 느꼈다.


*


정문은 은화의 손을 매만진다.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게 해 준다고 했는데, 사실 그건 관용어구임을 정문도 알고 은화도 알고 있었다.

다만 정문이 바깥일을 성공적으로 해내어 ‘가장’으로써의 역할을 공고히 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은화가 바깥에서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게 되는 것이므로 어느 정도 약속을 지킨 셈이라고 정문은 스스로 되새김질했다. 은화 역시 집안에서 자신을 ‘내조’ 하기 위한 역할을 맡고 있고, 그러기 위해서는 따뜻한 집밥을 만드는 노동을 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고 여기고 있다. 다만 감사하게, 그 역할에 충실히 임해주는 은화에게 감사함을 표해야 하는 것을 정문은 잘 알고 있다.


 은화는 나가서 일을 하고 싶다고, 그리 말한 적이 없지만 결혼할 때 은화는 사회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과 결혼함으로써 자신의 제안에 의해 일을 그만두게 된 것이므로 어쩌면 언젠가, 정문에게 은화가 자신 역시 나가서 일을 하겠다고 한다면 정문은 어찌 반응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당연히 나가서 일하는 것에 대해 찬성하고, 응원하는 것도 방법이지만 어딘가 내키지 않는다. 은화가 자신에게서 돈을 받아쓰고, 자신은 그 돈을 제공하는 사람이 되는 지배에 대한 욕구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돈을 충분히 안정적으로 벌고 있기에, 날 존중해 주고 떠받들어주는 누군가가 집안에 있어줬으면, 그게 바로 내 아내, 은화였으면.


*


 은화는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자신을 돌볼 틈 없이 매일매일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행복하기도 했지만 고됐다. 연속되는 매일이 바위를 계속해서 꼭대기 위로 옮기는 시지프 같았다. 아이는 꼭짓점을 가지고 있고 은화는 정상을 향해 커다란 바위를 굴린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바위는 가장 낮은 곳으로, 낮은 곳으로 굴러간다. 절망할 새 없이 은화는 묵묵히 가장 낮은 곳으로 달려간다. 그리고 다시 바위를 정상으로 올린다. 은화가 정상으로, 아이가 만족하는 꼭짓점으로 바위를 올려놓아야만 다음 날이 될 수 있다.


*


 정문은 아직 부모가 되지 않았다. 다만 집에 들어왔을 때, 은화가 첫째를 가졌을 때처럼 단정한 옷차림으로 그를 위한 밥을 차려둔 채 그를 기다리고 있는 날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건 실감하고 있다. 은화는 오늘도 어제 입은 늘어진 티셔츠를 입고, 손목에는 보호대를 찬 채 머리는 산발이다.


 겨우 재워둔 갓난아이를 괜히 깨워보는 정문이 이해가지 않는 건 아니지만, 은화는 울컥할 때가 있었다. 정문은 여전히 제 사업에 열중하는 것이 자신의 역할의 전부라고 생각하고 성실하게 일한다. 하지만 낳은 아이를 돌보는 일은 모두 은화의 몫이 되었고, 은화에게는 큰 변화와 스트레스를 가져다줬다. 둘째 아이는 자신의 아버지를 보고 방긋 웃는다. 정문은 아이의 웃음에 자신의 피로가 삭 가시는 경험을 한다. 첫째 아이는 거실에 설치된 인디언 텐트 안에서 담요를 덮고 잠들어 있다.


“정우 어린이집은 알아봤어?”


곧 만 3살이 되는 정우를 맡길, 집에서 가까운 어린이집을 찾아보고 있다. 은화는 이런 정보들에 대해서도 문외한이다. 엄마들이 모여있는 맘카페에 가입하고 정보를 모아도, 결국 상의할 사람은 없고 아이 문제를 은화 스스로 결정해야 했다. 상의할 아이의 아버지는 새벽에 나가서 늦은 저녁에 들어오기 때문에.

은화의 마음속에 정문이 은화에게 주는 매달의 ‘용돈’, 내지는 ‘보너스’가 받고 싶지 않을 때가 생겨났다. 정문이 은화를 존중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


가끔, 정문은 은화에게 알 수 없는 소리를 했다.


“은화야, 피곤한 건 알겠는데 옷을 좀 더 단정히 입어줄 수 있어? “


은화에게 옷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옷은 그저 전투복, 전투화였다. 몸을 가리는 용도,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은화는 정문이 왜 그렇게 자신의 옷차림에 대해 신경을 쓰는지 알 수 없었다. 정문은 계속해서 옷이 더 필요하지 않니, 쇼핑하러 백화점 갈래, 물었다. 은화는 자신의 품에 안긴 아이를 안고, 흔들거리며 그저 빛 좋은 개살구인 정문의 말을 자신의 낮은 육아참여도에 대한 변명, 혹은 보상으로써 말하는 것이라고 받아넘겼다.


*


정문은 힘든 은화를 모르는 건 아니지만 모르는 체했다. 모르는 체 시간이 약이거니 기다린다면 은화 역시 힘든 시기를 지나고 언제나처럼 자신을 맞이하는 ‘아내’로 돌아오리라.

세련된 옷을 입고 주방에서 자신이 먹을 밥을 차려두는 아내.


*


 정문은 힘들어하는 은화가 불쌍했지만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돈은 다 자신이 벌어다 주고, 은화가 해야 할 일이라는 건 제 배로 낳은 우리 아이를 건강하게 기르는 일, 그리고 자신의 집을 지켜주는 일뿐이었다. 집안 살림이 여기저기 널려있고, 말끔하지 못한 은화를 보고 있노라면 자신의 능력이 부족한 탓으로 생각되어 괴로웠다. 내가 만일 돈을 더 충분히 벌었다면 집안은 정돈된 질서를 가지고 있을 것이고, 아내는 여전히 고운 손으로 나의 외투를 받아 들고 저녁식사를 준비해 뒀을 텐데.


*


간혹 은화가 침대에 누워서 힘든 하루를 보내고 온 자신에게 간단히 인사하며 “국은 냄비에 들어있으니 끓여드세요.”하는 말 따위를 듣고 있노라면, 정문은 자신의 신세가 가여워졌다. 이런 대우라니. 정문은 화장실에서 손을 씻고 곧장 은화 옆에 누워있는 둘째 정현을 둥기둥기 흔들며 은화에게 말했다.


”은화야, 애들 보느라 그간 마음 놓고 쉴 시간도 없었지? 애들은 나한테 맡기고 내일 잠깐 백화점이라도 다녀와. “

“당신 일은 어떻게 하고 그래요? “

”내일 회영 씨랑 같이 밥 먹기로 했는데 취소하고 우리 딸이랑 같이 있지, 뭐. 이제까지 정우랑 정현이 마음껏 안아준 적도 없고. “


은화는 애들을 예뻐할 줄만 알지, 분유도 한 번 안 타본 정문을 믿을 수가 없다. 결국 정문은 정우를 안아 들고 은화는 정현을 유모차에 태우고 백화점 나들이를 갔다. 사실 정문이 은화에게 이런 제안을 했던 건 깔끔하고 세련되게 멋 낼 줄 아는 아이 낳기 전 은화가 그리워서였다.


 은화가 평소 좋아하던 화려한 패턴플레이의 브랜드를 지나 조금은 미니멀하고 심플한 스타일의 매장으로 갔다. 첫째 정우는 쇼핑이 계속되는 쇼핑이 지루하고 좀 전에 지나쳐온 솜사탕이 아른거리는지 제 아빠의 손을 잡고 자꾸만 매장 밖으로 나가자고 한다. 다행히 정현은 잠들어있고, 은화는 안심하고 옷을 골라 재빠르게 옷을 입어본다. 자신의 몸, 전신을 자세히 본 적 없었는데 옷가게 탈의실 전신거울에 비친 자신의 몸은 가관이었다. 관리를 한다고 했는데… 아이를 낳은 지 1년 조금 지났지만 여전히 배는 나와있고, 허벅지 뒤에서 엉덩이까지 튼살이 이어져있다. 뿐만 아니라 가슴은 탄력 없이 처져있다. 즐겁기 위해 나왔지만 은화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적잖이… 놀랐다.


*


정문은 아이들이 하고 싶은 건 다 해주고 싶어 한다.


 정우가 아빠를 이끌고 아장아장 걸어간 곳에는 솜사탕이 있었다. 정우 한 입, 정문 한 입. 로비에 있는 벤치 구석에서 잠든 정현이 있는 유모차를 흔들거리며 은화를 기다렸다.

 은화는 아무것도 사지 않고 가게를 나왔다. 은화는 정우와 정문을 향해 환하게 웃고 있지만, 어딘가 달라 보인다. 정문은 은화를 본다. 푸석해진 긴 머리카락을 감추기 위해 하나로 묶고 운동화에 편안한 트레이닝 차림의 은화. 정문은 깔끔한 피케셔츠에 청바지, 단정한 구두를 신고 있었다. 분명 결혼할 때만 해도 은화는 아름다웠다. 두 아이를 낳은 은화는 다른 느낌으로 아름다웠다. 하지만 정문은 은화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했다. 무릎 나온 트레이닝복이 추레하다.. 새 옷을 마련해 입지라는 생각이 반복됐다.


 정우가 끈적이는 손바닥을 정문에게 내밀자, 정문은 주머니에서 꺼낸 휴지로 정우의 손바닥을 닦아준다. 은화는 유모차 뒤에 챙긴 기저귀가방에서 물티슈를 꺼내 정우의 손바닥을 다시 닦인다. 마음에 드는 옷이 없어서 나왔다는 은화의 말에, 정문은 그래도 옷 하나 고르지 말하며 8층 딤섬집에서 저녁을 먹고 집으로 갔다.


*


“엄마, 엄마는 똑똑한 것 같아.”

“엄마가 똑똑했으면 결혼을 했겠니?”

정현은 은화에게 묻는다.

“그럼 결혼을 안 했다면 엄마는 뭘 했을 거 같아?, 아니, 이은화 씨는 무얼 했을 것 같아? “


정현은 말한다.

“엄마, 내가 어릴 때 책을 좀 많이 읽었잖아, 내가 그래서 능력이 생겼어. 엄마를 다시 20대로 돌려줄 수 있는 힘 말이야. “

정현의 말을 무슨 이상한 소리 다 듣겠다는 듯, 피식 웃으며 은화는 말한다.


“나도 그런 영화 많이 봤어.”


“아니, 정말로. 나는 엄마가 다시 삶을 살기를 바라는 이유가 있어. 딸은 엄마의 운명을 반복한다고 하잖아, 나는 엄마가 더 즐겁고 다양한 삶을 살았더라면, 그랬다면 좋았겠다 생각해. 지금도 늦지 않았어. 지금 엄마가 56세이니까, 엄마에게 남은 수명이 30년가량 남았다고 치면 다시 엄마는 20대에서 50대가 되어가는 과정을 새롭게 풀이할 수 있는 거야.”


정현의 말을 무시하고 갈치를 굽는 은화에게 정현은 말을 끝맺는다.


“엄마, 아니, 은화야. 마음이 바뀌면 언제든 나에게 얘기해. 네가 어떻게 살았으면 좋았을지, 한번 생각해 봐.”


어딘가 비장한 정현은 생소하다.


정말 스무 살로 돌아간다면 나는 어떤 삶을 살아야 잘 살았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결혼을 바라서 했다기보다 남들 다 하니까 그중 나은 사람을 골라서 결혼하긴 했는데, 지금 은화가 받는 취급은 그야말로 가정부가 따로 없다. 사랑도 한 때다. 은화는 차라리 혼자 평생 좋아하는 걸 즐기며 살았다면 즐거웠을까 상상하다가 문득 갈치를 뒤집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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