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dern Lonliness - Lauv
어떤 일을 시작할 때에는 당연하게도 두려움이 따른다. 그래서 무엇이 시작을 망설이게 하는지, 머뭇거리게 하는 이유를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이후 취하는 태도에 영향을 준다.
글을 쓸 때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생각은 ‘시시한 것이 될까 봐.’로 시작한다.
다들 쓰는 똑같은 메시지가 될 텐데 왜 무언가를 쓰려고 하는 것인가.라는 생각으로 이어지고,
지금 나는 정체성 위기와 가치혼란에 빠져 사회적 인정을 받기 위해 글을 쓰고 있는 것인가,라는 생각으로 끝맺는다.
이런 생각을 거치고 나면 일기장에나 쓸법한 글을 브런치에 올리는 건지 그 이유를 점검하게 된다. 나는 정말이지… 관심과 인정에 목이 말라서 어떤 구설수의 가능성을 무릅쓰고 최소한의 보호장구인 익명성을 걸친 채 나의 사회적 실존을 인정받고자 글을 쓰고 있는 건가. 그러면 스스로의 사회적 위치가 공고해지면 나는 글을 덜 쓰게 되는 것인가.
확언할 수 있는 건 유동사회의 정체성 혼란을 겪고 자기 탐구의 도구로 글쓰기를 선택했다는 사실이다. 인정하기 싫은데 정확하다.
내가 추구했던 이상적인 나의 모습도 글에 반영된다. 종합지식인. 지덕체. 토털 인텔리, 만물박사… 레오나르도 다 빈치 위인전을 좋아했다.
지적 허영심이 있는 행동. 하지만 이상적 자아와 현실 자아가 합일되지 않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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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엔 수많은 변주들로 가득하다. 물론 나 역시 수많은 변주들 중 하나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른 누군가가 나를 알아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공명(과학). 물체의 고유 진동이 있고, 그 진동에 맞춰서 같이 진동하면 크게 진동한다. 초등학생 때 소리굽쇠 실험이나 성악가가 목소리로 유리잔을 깨는 영상이 그 예다.
지음(한자성어), 소리를 안다,라고 직역할 수 있고, 더 풀어서 해석하면 소리를 알아주는 사람,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춘추전국시대의 백아는 거문고를 잘 탔는데, 그의 친구 종자기는 백아가 거문고를 타면 백아의 마음을 알아챘다. 백아가 산을 생각하면서 연주하면 종자기는 산 같은 연주라고 하고, 강물을 생각하면서 연주하면 물소리가 떠오른다고 이야기했을 정도니, 백아는 이렇게 자신의 소리를 알아주는 사람은 종자기밖에 없다고 말했다. 종자기가 병에 걸려 먼저 세상을 떠나자, 백아는 이후 거문고의 현을 끊고 다시는 연주하지 않았다고 한다.
’ 너, 내 동료가 되어라.‘라는 이젠 밈이 된 원피스 대사도, 뉴진스 신곡 ’버블검‘ 뮤비에서 순수한 말투로 ‘넌 역시 짱이야, 나랑 친구할래?’ 하는 말도 ‘날 알아봐 주세요.’의 여러 변주라고 생각한다.
요즘같이 자신의 현실, 주변 사람들의 사생활을 알기보다 스마트폰 속 이야기에 촉각이 곤두서고 도파민이 분출되는 시대에 비대해진 자아를 안고 나를 상처 주지 않을 사이버 친구를 만드는 사업의 파이가 커지는 건 자연스럽다. 아이돌 산업이 특히 더 그렇다. 화면 속 편집된 사람을 좋아하는 건 간편해서 중독성 있다. 생각해 보면 사랑이 많아서 금사빠인 게 아니라, 쉽게 좋아할 수 있는 환경이 있어서(미디어 기반의 풍부한 콘텐츠) 금사빠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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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생 때 단짝 친구와 뭘 자주 주고받았다. 청포도 사탕, 고양이를 그린 쪽지, 교환일기, 찰흙토끼, 지우개, 샤프심…. 이런 소소한 물건들은 기호일 뿐이고 그 안에 담긴 건 ‘내가 널 이만큼 좋아해. 너도 내가 좋아?‘, ’ 내가 좋아하는 걸 네가 좋아할까?’, 더 나아가서 ’ 너는 나한테 소중해.‘라는 애정표현이었다.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될수록 순수한 표현을 시도하는 건 어려워졌다. 어릴 땐 몰랐던 세계가 확장되면서 개인의 취향 폭은 넓어졌기에 상대방이 뭘 좋아하는지 알기 어려워졌을뿐더러, 개인적 역사로는 솔직하고 순수한 표현이 왜곡되거나 그 자체로 상대방에게 상처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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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베르토 에코의 책 ‘미친 세상을 이해하는 척하는 법’을 읽었다.
사람들은 유명세를 위해서 기꺼이 프레임 안으로 들어가려고 한다. 브이로그와 같은 자신의 생활을 담는 유튜버도 그렇고, 사적인 취향을 브런치에 올려 책으로 만든다던지… 타인은 전혀 관심도 없는 이야기를 너절하게 정보의 바다에 방류한다. 왜 그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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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런 미친 짓이 대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궁금했다. 하비아스 마리아스는 인간이 더 이상 신을 믿지 않아서 그렇다는 과감한 가정을 내놓았다. 옛날 사람들은 자신이 무슨 짓을 하건 항상 자신을 지켜보고, 자신의 모든 행동과 생각을 읽고, 자신을 이해하고, 또 필요할 땐 벌까지 내릴 수 있는 존재가 최소한 하나는 있다고 확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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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이 위대한 증인이 사라지거나 쫓겨나고 나면 뭐가 남을까? 사회의 눈, 타인의 눈이 남는다. 사람들은 남들에게 잊히지 않기 위해, 이 사회에서 익명의 블랙홀에 빠지지 않기 위해 속옷만 입은 채로 술집 테이블 위에서 춤추는 얼간이 짓도 마다하지 않는다. 모두 남의눈을 의식한 행동이다. 텔레비전 출연은 저 초월적인 존재를 대신하는, 저네적으로 고마운 유일한 대용품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텔레비전이라는, 현실과 다른 피안의 세계에 들어가 있고, 그 피안에서 남들에게 자신을 보여 줄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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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어리석은 일은 이런 경우 사람들이 <알아본다>는 의미를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성취나 희생, 또는 그 밖의 좋은 특성을 남들이 <알아주기>를 원한다. 하지만 우리가 텔레비전에 나온 다음 날 누군가 카페에서 우리를 보고는 <야, 어제 너 텔레비전에 나온 거 봤어!> 하고 말한다면 그건 단순히 네 얼굴을 알아봤다는 것이지, 너를 알아준다는 뜻은 아니다.
“ , 30-41p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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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 면접을 보러 가서 날 뽑아주길 바라는 것과 가수가 많은 사람들이 나의 팬이 되어주길 바라는 마음은 닮았다. 책에서 말하듯이 알아보는 것과 알아주는 건 다른 의미다. 사람들 대부분 다 눈을 뜨고 보고는 있지만 무언가를 알아보는 사건은 드물다. 인생에 진정한 친구가 있다는 건 굉장한 행운이다.
생각해 보면 현대인 삶의 문제점이라고 꼽는 것 중에 하나는 ‘외로움’이다. 누군가가 내 마음을 알아줬으면, 나만 이런 게 아니었으면 하는 공감과 닿아있고, 우리는 같은 주파수를 가진 사람들을 만나길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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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삼촌 이모 사촌들이 모여 빈소를 지켰다. 할머니는 빈소 뒤에 마련된 가족실에서 쉬고 계셨다. 저녁에 고모가 빈소를 찾아오셨다. 고모는 눈시울이 붉어져서 할머니 손을 잡고 위로의 말을 건넸다. “밥도 잘 드시고, 건강하셔야죠. … ” 빈소를 지키느라 문 가장자리에 서있던 나는 이 한 문장만 들었는데, 빨개진 눈으로 할머니를 쳐다보는 고모와 고모의 손을 잡고 울먹이는 할머니를 보고, 그리고 그 모습을 보는 이모의 붉어진 눈을 봤다.
같이 울어주고 같이 웃어주는 것이 공명이고 가까워지는 일이다.
한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는 글을 너절하게 쓰는 이유도 한 문장으로 표현되지 않는 맥락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렇게 긴 글을 쓰면서 오늘도 나는 스스로 이해받기를 바라는 나를 바라봤다.
k pop 곡 중에도 주파수에 관한 노래가 있다. 방탄소년단 - whalien52, NCT Dream - 고래, NCT - resonance ….
또 뭐 함께하자, 이런 메시지를 담은 노래도 있다. 르세라핌 - unforgiven - “나랑 저 너머 같이 가자 unforgiven girls”
현실을 잘 감각하는 건 스마트폰 너머의 편집된 세상을 시청하는 시간보다 내 시간을 아는 것이다.
드러내는 거? 괜찮다.
별거 아닐 것 같아서 두려운 거? 별거 아니라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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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을 완수했더라도, 또 그 일이 아무리 선하고 옳다는 생각이 들더라도 뻐길 필요가 없다는 것을, 특히 자만심에 빠져 떠벌리고 다녀서는 안 된다는 것
자신의 행위를 항상 의심하면서 지난 삶을 충분히 잘 살지 못했음을 자각하는 것, 그래야 나머지 시간을 더 잘 보내려고 노력할 수 있음
22-23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