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self - Post Malone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나 태도는 사람의 가치관에 따라 다르고, 뭐가 좋다 나쁘다고 판단할 수 없다.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는 라캉의 말이 있다. 나는 라캉이 무슨 맥락에서 이런 문장을 꺼냈는지 모르지만 대학교를 다니면서 읽은 책에서 이 문장을 우연히 발견했을 때 혼란스럽던 방황 속에서 간지러운 부분을 시원하게 긁은 듯한 개운함을 느꼈다.
사소하게는 우연히 친구와 대화 중에 햄버거 이야기가 나왔는데 저녁에 갑자기 햄버거가 먹고 싶어 진다던지, 친구가 데이식스를 좋아해서 나 역시 데이식스의 팬이 된다던지, 친구가 새 이어폰을 샀는데 나도 새 이어폰을 사고 싶어 진다던지….
내 주변의 사람들에 의해 나의 욕망이 일어난다/발생한다는 걸 느끼는 순간은 일상에 있다.
대중매체는 진로에 있어서 내게 영향을 가장 크게 미친 욕망거울이다. 신사의 품격이라는 드라마가 학생 때 유행했었고, 주인공의 건축사라는 직업이 근사해 보여서 건축학과에 진학하게 된 것도 여러 계기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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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를 다니면서 나는 학교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복합적인데, 우선 내가 바라는 걸 잘 알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래서 대학생활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는 인간관계에 대해서 큰 의미를 두지 않고 지냈다.
이 결정에 대해서 후회하기도 하고, 외로웠던 적도 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땐 그게 최선이었겠지, 생각한다. 이런 생활에도 장점은 있는데, 인간관계에서의 신뢰를 관리할 필요가 줄어들어서 그 에너지를 온전히 내가 바라는 곳에 쓸 수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런 고독한 학교생활로 내가 얻은 결론은 사람들이 주변에 없으면 조금 더 내 마음에 대해서 솔직할 수 있긴 하지만 주변에 사람들이 없다면 내가 있는 이유도 희미해진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대학생활이 그리 즐겁지 않았기 때문에, 가끔 내가 미디어로, 심지어 드라마로 대학 전공을 선택한 게 옳은 선택이었는지 반추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좋은 선택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런 생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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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입을 한 번 실패하고 느낀 점은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안다’는 게 정말 어렵다는 사실이다. 과학고등학교 입시에 도전했다가 최선을 다하지 않은 스스로에게 실망하고, 수학, 과학을 정말 내가 잘하고 좋아하는지에 대해서 굉장히 의심을 많이 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이 생각은 매일 했다. 내가 진심으로 임하지 않았던 건 내가 정말 좋아한 게 아니라서 그런 게 아닐까. 이런 생각 말이다.
과거 생각/행적들에 대한 평가는 시간이 흘러가는 매 순간 변화하는데 그땐 몰랐지만 나중엔 인정하게 되는 부분들이 생긴다. 그때 나는 수학, 과학을 좋아했다는 걸 지금은 인정한다. 의심할 필요도 없이. 물론 과학고등학교 입시는 안 풀렸는데 모든 과목 중에 문학, 수학, 과학을 좋아했던 건 사실이다. 입학사정관 분들이 보실 땐 다른 친구들이 더 좋아하고, 더 잘한다고 생각해서 내가 그 자리에 가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내가 그 마음에서 뒤처진 건 아니었다.
건축학도가 되고 나서도 ‘내가 좋아하고 잘한다고 믿는 게 사실인지 아닌지 어떻게 아는 건가’에 대한 답을 내릴 수 없었다. 판단의 기준이 나에게 없었기 때문에.
타인의 기준을 스스로에게 그대로 적용시키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다. 왜냐하면 학창 시절 내내 다 평균에서 평균 이상에 속해왔고, 평균의 기준이 버겁다고 느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스로 줏대 있는 걸 바라지만 나에겐 줏대보다 타인의 잣대가 편한 사람이었다. 그런 면에서 게을렀고, 대학에 와서 스스로 불편해진 부분이 많았다. 모든 면에서 언제나 수월하게 평균 이상이 되는 건 세상이 작았을 때나 가능한 일이었고 나는 그 사실을 이제 인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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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을 졸업할 쯤이면 다들 자신의 일자리를 찾아 나선다. 대부분은 이걸 해야지, 저걸 해야지가 있는 편이다. 타인의 욕망을 욕망했건, 아니면 진심으로 자신의 욕망이 그러하던 상관없이.
흐름이 끊기는 걸 두려워해서 내 마음을 모른 척하고 내달릴 수도 있지만 댐에 구멍 난 것처럼 미뤄뒀던 고민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폭발했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느라 에너지가 고갈된 상태여서 그럴 여지가 없었다. 고민이 많을 땐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던 마음에 여유가 없다.
지금은 타인이 욕망하는 게 내가 욕망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 위에서 내가 너무 크고 깊게 고민했다는 생각이 든다. 시간이 흘러가면서 가만히 있어도 오고 가는 건 고민할 필요가 없는데.
타인의 욕망을 그대로 욕망하는 것이 두려워서 대인관계의 폭을 줄이고, 스스로에게 한 질문이 ‘진심으로 내가 하고 싶은 건 무엇인가(내가 바라는 내 모습).’였다.
무얼 하고 싶은지는 아직도 모르겠고, 좋은 친구들과 세상에 긍정적인 일을 오래 같이 하는 걸 바라고 있다. 많은 사람들의 눈을 바라보며 너의 욕망을 내가 같이 욕망하는 걸 거부했는데 이젠 타인의 눈을 바라보고 싶다는 말을 하게 됐다는 점에서 크게 달라졌다.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게 두려웠던 건, 나도 모르게 하나의 경주를 시작해 버리다가 또다시 탈진하는 게 두렵기도 하고, 또는 도덕적으로 잘못된 목표인데 그것도 모르고 내달리는 게 위험하다고 생각해서 그렇다. 정신이 지쳐서 제대로 된 판단을 하지 못할 때 사고가 난다.
Pain is inevitable, Suffering is optional.
아픔은 피할 수 없지만, 고통은 선택하기에 달렸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무라카미 하루키의 수필에서 용기를 얻은 문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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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하자면 내 욕망이 타인의 욕망인지 헷갈릴 때 굳이 내 욕망인지 타인의 욕망인지 판가름할 필요는 없고 그 욕망의 끝이 옳은 일인지 판단하는 게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우리는 다 서로의 눈을 보면서 살아가는데 남들이 바라는 걸 똑같이 바라보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덧붙이자면 내가 꼭 그 일을 해야 하는 건지 스스로에게 물어봤을 때 대답을 구체적으로 하면 타인의 욕망이 내게 체화된 것이든 그저 스스로에게서 일어난 욕망이든 상관없이 그냥 하게 된다. 아니면 그 질문조차 필요 없을 정도로 그냥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한 고민은 평생 모를 사람들의 소식을 제깍제깍 알 수 있는 방법이 많아져서 발생하는 혼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