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legatan - Emil Ingmar
적응은 생존의 문제다.
조직에 들어가서 적응하지 못하는 경우나 심은 토마토 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경우가 떠오른다.
뒤이어 일, 이년 전에 삼촌이 사회생활을 앞둔 나에게 조언 삼아해 주신 말이 떠오른다.
- 어딜 가도, 적응 잘하면 된다. 고민 너무 많이 하지 말고.
새로운 환경에 가면 그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배워야 하는 것들이 있다. 유학을 가면 언어와 그 나라의 문화를 배워야 하고, 요즘같이 모든 안부를 카톡과 문자, 전화로 묻는 시대에는 디지털 기기를 다룰 줄 알아야 하고, 새로운 집단에 들어가면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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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세계에 발을 들였는데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다면 그건 정말 큰 문제다. 떠날 힘이 있을 때 발걸음을 떼거나 도움을 받을 수 있으면 도움을 받아야 한다.
떠나더라도 살아있다면 괜찮다. 그 땅에서 적응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아플 수는 있어도 다음을 도모할 수 있는 기회가 남아있으니까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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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경우는 대학생활에 적응을 못했다. 몇몇 과목은 교수로부터 배우는 게 없는 것 같아서 아쉬움과 실망이 컸고, 다른 한편으로는 적극적으로 친구를 만들지 못했다. 그래서 대학생활에 별 애정이 없다.
대학에 입학하면서도 내 인생이 실패했다고 생각했다. 꿈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내가 괜찮은 삶이라고 생각하는 기준선을 높이 그어놨었기 때문에 인간관계, 재산, 능력, 학벌 모든 게 미달이었다. 물론 그 기준은 부모와 사회로부터 영향받은 바였다.
그 선에 누워있는 나는 미달인 인간으로 느껴졌었다. 깊이 생각할 시간을 갖기보다 남들보다 빨리 문제를 풀어내는 것에 집중했기에 늘 피곤했다. 지금은 그 속도라는 게 인간이라는 범주 안에서는 굉장히 미미한 차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땐 속도가 전부인 줄 알았고 학업은 재미가 없었다. 잠깐의 사색도 사치같이 느껴져서 책도 읽지 않는 나는 점점 멍청해지는 것 같았다. - 이건 아버지의 말과도 관련이 있는데, ‘고3이 소설책을 읽어? 여유롭네?’라는 불안감을 주는 말이었다. 그때 아버지에게 ’ 여유가 있어서 읽는 게 아니고 읽어야 하니까 읽는 거예요.‘라고 확신에 차서 이야기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땐 내게 자신감이 없었다.
고등학교 내내 왜 열심히 해야 하지, 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을 헤집고 다녔고 나는 답이 없는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지 못하고 탈진한 채로 대학생이 되어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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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똑똑이.라는 단어는 나를 지칭하는 것 같다.
나는 똑똑하다는 칭찬을 좋아했는데, 정작 그런 말을 듣다 보니 그 말이 싫어졌다. 내겐 내실이 없었다.
일곱여덟 살 무렵부터 나는 과학잡지를 읽으며 종종 부모님에게 새로 알게 된 지식이나 정보를 이야기하곤 했다. 대화를 하고 싶어서 그랬는데, 부모님은 상식과 예절에 대해서는 잘 알지만 과학엔 문외한이었다. 그러다 보니 부모님에게 종알종알 책에서 나온 정보를 이야기하면 내가 그들에게 지식을 자랑하고 부모님은 진심으로 칭찬하는 꼴이 되었다. 나는 칭찬 말고 토론이나 질의응답을 하고 싶은 것이었는데 상대를 잘못 찾은 셈이다.
결국 알고 싶은 것을 알게 된 건 하나도 없고 대답하거나 대화할 사람도 없어서 답답했다. 표면적으로는 긍정적이지만 영양가는 없는, 쌓이고 쌓이다 보면 판단에 불과한 ‘똑똑하다’라는 칭찬만 메아리처럼 울릴 뿐이었다.
그리고 이후엔 똑똑하다-라는 것에 집착을 하기 시작했다. 똑똑해지려면, 아니, 똑똑해 보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근데 그건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
똑똑함에도 종류가 있는데 나의 경우는 ‘잘 교육된 사람’이 ‘똑똑하다’로 정의 내렸기에 모범생에 책을 많이 읽는, 성적이 우수한,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예의 바르고 친절한, 그런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다. 초등학생 때 전과를 싹 다 훑으며 암기하는 친구가 있었는데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내가 생각하는 똑똑한 사람은 그래야 하는데, 나는 그러지 않으니까 스스로에게 조바심도 났다. 조바심이 나건, 불안하건 어쩌든 간에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나는 그냥 살던 대로 열심히 하는 척-하지만 사실 요령껏 공부하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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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는 ‘착한 나’라는 이미지에도 집착하는 편이었다. 모든 사람들과 우호적으로 지내고 양보도 잘하는 사람이고 싶다는 욕심이 있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내가 되고 싶다고 억지로 행동하면 탈이 나는 법이다.
학기 초에 같이 밥 먹을 사람이 없어서 난처해하는 아이가 있어서 내가 사귄 아이들과 함께 밥을 먹으며 그 학기를 지낸 적이 있다. 하지만 그 친구는 다른 친구와 성향이 맞지 않았다. 단순히 성향이 맞지 않았다는 문장은 많은 내용을 내포하는데, 일단 누구에게는 좀 짜증 날 뿐, 별거 아닐 말이 누군가는 지긋지긋한 놀림으로 다가올 수 있는 일이고, 생각보다 일은 쉽게 커진다. 결국 나는 다 같이 친해지려고 노력한 것에 굉장히 후회했다.
‘착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는 건 죄가 없지만 결과는 처참했다. 정말 착한 행동과 ‘착한 사람 되기‘는 큰 차이가 있다는 걸 배웠다. ‘착하다’의 여부는 상대에게 달려있는 것이다. 내가 되고 싶어서 되는 게 아니라 상대가 행복해졌을 때 나도 착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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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다정한 말이 역할 때가 있다.
서로를 혐오하는 주인공 둘이 모종의 이유 - 상호 이익 -에 의해 가식적으로 친한 척 구는 것을 볼 때처럼 상대에게 조그마한 애정도 없으면서 자신이 타인에게 어떻게 보이고 싶기 때문에 - 자신의 욕심에 의해 - 행동하는 것을 볼 때면 그러하다.
근래 들은 가장 역한 말은 ‘나도, 다른 사람들도 너를 도울테니 네가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이야기해.’였다.
그 말을 한 사람은 언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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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 강아지도 상대방이 나에게 애정이 있는지 없는지 안다. 언니는 애정 없이 애정 있어보이는 말을 했다. 그게 보기 좋으니까.
자라오면서 느낀 바로는 언니는 나를 ‘챙겨야 하는 모자란 애’로 생각한다. 연장자로서 동생을 귀찮아하면서도 어쩔 수 없는 장녀의 책임감에 의해 최선을 다했다. 종종 부모에게 화를 내기도 했다. ‘왜 쟤한테 내가 양보해야 하는데!’ 혹은, ’ 내가 왜 쟤를 챙겨야 하는데, 귀찮게.‘, 그리고 원망 어린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는 했다. 그러면 나는 그냥 미안해졌다. 그냥 둘째로 태어났는데 그랬다. 이해는 가는 게 혼나도 나보다 더 엄하게 혼났으니 자신보다 덜 엄격하게 자라는 내가 어린 마음엔 얄미울 수도 있겠다 싶다.
언니가 중학교 입학하기 전만 해도 좋다고 따라다녔다. 그리고 언니가 중학생, 고등학생이 되자 아버지와 갈등이 심해졌다. 내가 봤을 때 그냥 언니가 버릇없이 굴었던 게 8할이다. 나머지 2할은 아버지가 자신의 성격, 혹은 생활습관에 언니를 맞추려고 고압적인 태도로 굴었던 게 크다. 하여간 집안이 잠잠할 날이 없었다. 수저를 세게 내려놓고, 방문을 쾅 닫고 들어가서 안 나오고, 서로를 향해 소리 지르고…. 엄마와 나는 둘을 중재하려고 스트레스가 이만저만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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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는 자신이 화가 나면 나에게도 불같이 화를 냈다. 당연하다, 화가 가라앉지 않았으니까.
엄마는 언니가 걱정되는 나머지 나에게도 언니에게 가서 괜찮냐고 물어보기를 여러 번 부탁했고, 나는 매번 언니가 물기 어린 눈으로 나를 째려보는 시선을 받아내야 했다. 대학생이 되고 알았는데, 언니는 그때 내가 미웠댔다. 친구들과도 잘 지내고 부모와도 관계가 괜찮고, 자신에 비해 하고 싶은 일이 명확했던 내게 질투가 나서 미웠더랬다. 동생이 자신보다 더 우수해 보여서.
나는 언니가 나를 미워할 줄은 꿈에도 몰랐고 언니는 나에게 종종 화풀이를 했다. 퉁명스럽게 굴고, 부드럽게 말을 걸어도 대답도 안 하고 무시했다. 언니가 대학을 졸업할 때까진 그게 우리 집의 기본 값이었다. 나는 언니가 나에게 그런 식으로 굴면 당황스럽고 억울했다. 엄마에게 하소연하면 ‘이해해 주자.’라는 대답만 돌아왔다. 이해…? 이해라는 걸 나는 인내로 받아들였다. 한편으로는 집안에서 외로워 보이는 언니가 불쌍해서 그게 됐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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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는 습관처럼 집안에서 짜증 내고 다녔다. 나는 언니가 자꾸만 부정적인 걸 퍼뜨리는 게 너무 싫었다. 하나하나 지적하면 언니는 ‘나도 알거든? 근데 안 되는 걸 어떡하라고.’라며 짜증 어린 울음을 터뜨릴 것을 알기에 부모님이 말씀하시면 ‘시간이 지나면 모난 돌도 둥글어진다’라는 말에 기댔다.
놀랍게도 언니는 대학에 가서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고 적응을 잘하면서 어둡던 얼굴도 밝아지고, 짜증이 줄고, 아빠와도 갈등이 훨씬 줄었다. 특히 나에게도 크게 화를 내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습관적으로 언니의 눈치를 봤다. 가족끼리 모였을 때 점심 메뉴를 고를 때도 언니가 먹자는 걸로 먹고, 언니가 싫다고 하는 게 너무 많으니까 그것에 맞춰서 움직이고… 나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그저 너의 혈육이 예민하고 까다롭기에, 네가 이해해 주면 우리 가족이 좀 편하다…라는 식으로 굴러간다는 걸 나도 알고 있기에 내가 싫어도 까다롭게 굴지 않았다. 부모에게 소리 지르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언니를 둔 부모님이 불쌍해서, 그래서 그랬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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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과정에서 내가 느끼는 불편함, 혹은 상대방이 고쳐줬으면 하는 것을 말하기보다 내가 상대를 살피는 방향으로 자라와서 내 마음을 알아채는 것도 어려웠다.
그래서 대학생활 내내 울었는데 이유를 몰랐다. 그냥 밥 먹고 누워있으면 눈물이 줄줄 났는데 왜 그런지 알 수 없었다. 그게 내가 미숙한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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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 간 언니는 마음에 여유가 생겼는지, 더 이상 내가 밉지 않다고 그랬다.
언니와 나 둘이서 여행을 갔는데 속마음을 털어놓는답시고 자신의 미숙했던 과거를 고백했다. 나에게 용서받길 바라는 마음이었겠지 싶다. 과거에 자신이 동생을 미워한 마음을 동생에게 털어놓는 것도 용기였겠지 싶다. 하지만 나는 어이가 없었다. 언니가 까칠하긴 했어도 나를 미워했을 줄은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데.
순식간에 언니가 내 성공보다 실패를 바랐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으로 번져나갔다. 언니가 나에게 유해진 것도 내가 과학고등학교에 입학하지 못해서, 부모의 관심과 사랑을 잘난 동생이 가져가는 결과가 아니었기에 그랬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하지만 늘 그렇듯이 추측은 추측일 뿐이고, 사실이 아니다. 하지만 그런 생각만으로도 감정은 세게 불타오른다.
나는 그때부터 언니가 미웠다.
언니가 동생을 미워할 수도 있지…라고 넘어가기에는 내가 너무 크게 언니를 좋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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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엄마, 아빠는 그저 애정을 걱정으로만 표현할 뿐이었다. 애정의 표현이 걱정 하나라니, 참 가난하고 인색하다고 생각한다.
다 큰 자녀에게 뭘 그리 신경 쓸게 있나, 하는 그런 생각으로 ‘관심’이라는 포장지 속에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은 것을 자녀에게 내민다. 나는 그게 뭔지 안다. 네가 나에게 가져다 줄 편안한 미래, 노후, 그리고 약간의 명예면 더할 나위 없겠다는 기대.
자녀가 행복하게 사회에 나가 제 할 일을 하면 부모 역시 행복하다는 말을 하지만 거기엔 다 시간제한이 있다. 시간 내에 답을 하지 않으면 본인들이 ‘좋은 부모’가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에 두려워서 자꾸만 보채고, 밀어내고, 끌어낸다.
지구가 자전, 공전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계절과 밤낮의 변화로 연결되지 않으니 자꾸만 잊게 되는 사실인 것처럼 자녀는 언제나 제자리가 아니고 움직이고 있는데 자꾸만 제자리, 혹은 후퇴하는 것만 같아서 부모는 자녀 옆에서 자꾸만 ‘성장에 좋다는 말’을 쏟아낸다.
사실 좋은 부모, 좋은 누군가가 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건가 싶다. 결국에는 좋은 누군가가 되기 위해서는 상대방이 만족하고 잘되어야 하는 것인데 말이다.
이래서 우상숭배를 하지 말라고 했던 것 같다. 표면적인 무언가를 쫓지 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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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던 이야기를 마무리하자면 나는 언니가 나를 위한다는 느낌을 받은 지가 정말 오래되었다.
그래서 언니가 하는 그 어떤 좋은 말도 그렇게 좋게 들리지 않는다.
만일 할머니가 나에게 언니가 하는 말을 똑같이 했으면 감동받아서 울음을 터뜨렸을 것이다.
언니와 비할바가 아니지만 할머니는 나를 사랑으로 키워주셨고, 진심으로 나를 위하는 분이다. 눈빛과 행동으로 느꼈다.
언니가 했던 말이 역하다니, 너무 과한 표현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지만 나는 문장 그대로 그랬다. 스스로가 ‘좋은 ‘ 사람이 되고 싶어서 한 행동이 진심으로 상대에게 ‘좋은’ 행동이었는지 생각해 보면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다.
나는 언니에게 말했다. 가족들 앞에서 언니에게 그런 말을 들으니 수치스럽다고. 언니의 표정은 방황하는 저 ’ 애‘를 진심으로 도와야 한다는 얼굴이었다.
진심 어린 표현이었어도, 그게 단 둘이서였어도 그게 언니라서 나는 수치스러웠을 테고, 내가 그 말을 어떻게 받아들일지조차 알지 못하는 언니의 무심함이 한심했다. 언니는 부모님의 도움을 받아서 (물론 나도 도움을 받고 있지만) 현재 사회적으로 체면 차릴 수 있는 위치에 있기에 ‘너’ 역시 신분이 사회적으로 존중받는 자리로 올라가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언니의 단순한 마음에 나는 속이 울렁거렸다. 자신은 부모에게서 ’ 동생을 걱정하는 ‘ 언니로 인식되고, 또 한편으로는 나에게는 ’ 도움을 주는 고마운’ 언니로 인식되리라는 다분히 계산된 행동이지 않았나. 매일 도서관이나 다니고 집안일이나 하는 사회적으로 뒤처진 백수상태의 나에 대한 주제로 45분을 이끌어 도움을 주고, 기여할 기회. 나를 어떻게 보는지 알 것 같았다. 이렇게 비꼴 수 있는 것도 내겐 그렇게 보였기 때문에 그렇다.
이 모든 상황을 그저 모면하고 싶고, 나는 몰라도 남들에겐 다 괜찮은 것처럼 보이는 가장 빠르고 쉬운 방법은 부모와 언니 말을 따르는 것이다. 내가 ‘남들보다’ 괜찮은 상태가 되면 그들은 안심하겠지 싶다.하지만 그런 식으로, ‘남들보다’의 경쟁에서 스스로가 갈려봤기에 ‘남들보다’라는 개념이 얼마나 무상했는지를 느낀다.
위의 글은 내가 언니를 좋아하지 않기에 나올 수 있는 글이다. 나도 가끔 놀랍다. 그래도 언니가 살면서 도와주고, 잘해준 게 한두 번이 아닐 텐데 이런 악감정이 더 커 보이다니. 어쩌면 내가 정말 잘못된 상태일 수도 있다.
어머니는 언니가 튼 대화의 물꼬, 정확히는 대화의 주제에 굉장히 신나 하셨다. 자신의 걱정을 잘 털어놓으면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모범생인 둘째 딸은 늘 자신이 알고 있는 세상의 정답을 말해줄 거라고, 똑똑한 아이니까 그럴 거라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바람 - 공무원이나 괜찮아 보이는 직장 - 을 줄줄이 늘어놓으셨다. 그야말로 ‘나’는 알지 못하지만 ‘모두’가 고개를 끄덕일만한 것들 말이다. 나는 대답도 않고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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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하고 싶은 일에 대해서 가족들에게 이야기하라는 말이 나에게는 개구리를 구워 먹으라는 것보다 어려운 것이었다.
언니는 나를 전혀 보고 있지 않았다. 나는 과학고등학교에 못 간 게 그렇게 슬펐다. 스스로에 대한 의심은 깊어지고 자신감이 떨어져서 극복하지 못했다. 심지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모두가 알게 되면 나는 실패해서 창피를 당하고 말 것’이라는 생각도 가지고 있는 상태인데 언니도, 엄마도, 아빠도 아무도 몰랐다. 물론 내가 이야기를 하지 않은 것도 있다.
언니는 자신의 할 말이 상대가 들어야 하는 말보다 더 중요했던 것이다. 그게 서운했다.
분명 나와 가까워야 할 것 같은 사람들이 나를 모른다는 것이 이렇게 실망스러울 줄은 몰랐다. 각자가 바쁜데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싶다가도 어쩔 수 없다는 건 모든 이유가 될 수도 있기에 더더욱 이유가 될 수 없다는 걸 떠올린다.
그래도 괜찮다. 오히려 감사하다. 무심하고 미워할 가족이 있다는 건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