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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오십 Aug 27. 2024

섬세함

skating in the central park - 빌 에반스&짐 홀

시내버스를 타고 대학원생인 친구를 만나고 왔다. 2년 전만 해도 대학원이라는 새로운 환경이 두렵다고 말하던 친구는 어느새 적응을 잘해서 얼굴이 피어있었다. 물론 해야 할 일은 많겠지만 좋은 사람들과 편안한 얼굴로 학교를 다니는 친구를 보니 나도 기분이 좋아졌다.



*


요사이에 기분이 오락가락했다. 그럭저럭 아무렇지 않은 상태를 0으로 설정한 그래프의 마이너스 값에서 오락가락했다.

아직도 화날 일이 많고 별거 아닌데 터질 것 같이 슬플 때가 있다. 반대로 어떤 날은 햇볕이 따뜻해서 미소 지어질 때도 있다.

아버지는 내가 나이가 적어서 그렇다고 한다. 딱히 할 말이 없어서 그냥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마냥 젊어서 예민한 것 같지는 않다.

나이가 들어서 감각이 무뎌지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나는 나의 외할머니를 보고 그 생각을 접었다. 할머니는 여든둘의 나이에도 계절을 잘 느끼고 자연의 변화에 민감하다.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더 능숙한데, 이를테면 상대방이 기분 상하지 않게 필요한 요점을 전하신다. 한 마디로 할머니는 섬세하다. 하지만 감정의 진폭이 나처럼 요동치는 것 같지는 않다.


*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중학교 교복을 입은, 단발에 왜소한 체격의 아이가 손에 교통카드와 초콜릿우유를 들고 내 옆자리로 앉았다. 설마, 했는데 허쉬사 초코우유에 꽂혀진 빨때에서 약간의 초코우유 방울이 내게 튀었다. 거의 다 마시긴 했지만 소녀의 악력으로 생성된 기압차로 바닥에 조금 남은 음료가 몇 방울 튀어나온 것이다. 고의가 아니었고, 알았더라면 사과할 텐데 소녀는 알지 못했던 것 같다. 바지에 갈색 얼룩이 생겼다.


맨 팔에 묻은 초코 방울을 그냥 바지에 닦아냈다. 두어 정거장을 지나자 많은 승객들이 하차했고 버스에는 빈자리가 생겼다. 소녀는 짐을 챙겨 일어나더니 다른 좌석으로 자리를 옮겨 탔다. 나는 그럴 일이 아닌데 자꾸 소녀가 ‘나를 불쾌하게 한 것을 본인이 알까?‘라는 게 궁금했다. 참 옹졸하게도.

내가 하차하기 바로 직전 정거장에서 소녀는 하차했다.


이럴 거면 차라리 소녀에게 ‘저기, 초콜릿우유가 저한테 튀었는데 휴지 있나요?’라고 묻고 제로베이스의 상태로 남는 게 나았을지도 모른다. 내 머릿속에서는 소녀의 실수를 자꾸 되짚어서 지적하니까. 차라리 좀 더 마음을 넓고 곱게 쓰면 좋을 텐데. 후자가 어렵지만 또 마음먹으면 그만큼 내게 좋은 게 없다.


*


집에 와서 바지에 묻은 얼룩을 비누로 칠했다. 내가 소녀의 실수에 대해 내내 생각한 게 무색할 정도로 얼룩은 금방 빠졌다. 서너 번의 조물거림으로.


*


내 기분이 낮은 곳에서 오락가락했던 건 타인에 대한 연민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타인에게 관대하지 못한 스스로가 부끄럽고, 내가 이렇게 여유 없는 사람이었나 하는, 스스로를 잘 가꾸지 못했다는 생각에 자꾸만 자신감, 자존감이 깎여나간다. 모두가 이렇게 사는 건 아니지만 나는 그런 편이다.

그 아이가 초코우유 몇 방울을 흘렸을 때 ‘초콜릿우유를 간식으로 먹고 집이나 학원 가는구나, 고생이 많네.’ 하는 생각을 가졌더라면 아마 나는 스스로를 그리 나쁘게 보지 않았을 것이다.


*


타인에 대한 연민이 있는 사람을 떠올리자니 나의 외할머니가 생각난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혼자 생활하신 지 3개월이 지났고 그간 상실감과 치매로 밥을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할머니를 주말엔 우리 집으로 모셔와 함께 지내곤 했다. 저녁을 먹고 씻고 할머니 옆에 누워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개인적으로 할머니에게 궁금한 이야기를 내가 묻는 형식이었다. 대답하기 애매한 질문에도 늘 할머니는 간단하게 매듭을 풀곤 했다.


며칠 전에는 내게 운을 띄우셨다.


- 너도 외롭지?

- 네?

- 집에 혼자서 내내 있으려면 얼마나 답답하고 심심하겠어. 나도 집에 혼자 하루종일 아무도 없이 있으면 너무 괴로운데. 엄마아빠 잘 따라다니면서 많이 먹고 다니거라.(할머니는 아직도 나를 아기로 보신다.)


정확하진 않지만 집에서 혼자 아무도 모르는(직업적으로 인정받지 않는 시간을 보내는) 바쁜 생활을 하는 나에게 건넨 말이다. 참고로 할머니는 나와 함께 생활하지 않고 우리 집에서 40분 거리의 근교에서 홀로 생활하신다. 그럼에도 나와 같이 집을 공유하는 엄마, 아빠보다 내 마음을 제대로 들여다봤다.


*



*


화가 나는 건 타인에 대한 연민보다 자기 연민이 강해서 그랬고 예민함과 섬세함은 그와 다른 영역이라는 걸 할머니와 나를 비교하면서 느꼈다.

나는 굳이 따지자면 투박하다. 부모님도 그러신 편이다. 생일은 케이크로 끝이고 리본으로 장식한 선물 같은 건 없다. 편지는 더더욱. 부모님과 나는 스스로를 예민하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예민하다기보다 각자 자신에 대한 연민으로 타인을 제대로 못 보기에 소통이 안 돼서 생기는 소통의 오류가 잦았을 뿐이었음을 이제 느낀다.

할머니는 나와 부모님보다는 섬세하다.


타인에 대한 연민은 다른 사람들을 돕고, 미소 짓고, 양보하고, 인사하는 등.. 이런 여유에서 올 수 있다고 한다.

내일은 좀 더 미소 짓고 살기로 한다. 각박하고 투박함을 예민함으로 포장하는 것이 아니라 여유로운 관찰에서 오는 섬세함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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