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 (Hidden Track) - Coldplay
요즘은 어떻게 지내고 있나.. 생각해 보면 그냥 그렇게 지내고 있었다. 아무래도 뭘 제대로 해본 사람이라기엔 아무것도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서 그런가 뭘 해보려고 해도 진득해지지가 않는다.
지금 글을 쓰러 잠시 카페에 들렀는데 카페 내부에 있는 화장실을 이용하려면 카드키를 가지고 가야 한다. 직원분이 바빠 보여서 화장실에 가고 싶은 걸 미루게 된다. 어쩌면 전략일지도? 조금 야박하다고 생각했지만 나름 다 이유가 있겠거니 했다. 드디어 화장실 키를 가지고 일을 봤는데 그 앞에 “화장실 휴지 변기에 넣지 말아 주세요.”, ”더러운 꼴을 봐야 하는 다음 사람은 힘들어요. “라는 등의 문구가 프린트된 안내문 붙어있었다. 일곱 장이나 더덕더덕 붙어있다는 점에서 생각했다. 여기, 얼마나 자주 변기가 막히는 거야?
아무튼 감정에 솔직해지면 어떨까 싶어서 갑자기 글을 쓰게 되었다. 감정을 나타낸 것에는 무의식의 실마리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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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근 이틀 동안 기분이 안 좋았다. 가장 큰 이유는 내가 변변찮은 사람이라 그렇다. 특히 뭔가를 해서 돈을 버는 상황이 아니다 보니 ‘이러다가, 나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하는 청년 실업자로 생을 외로이 마감하는 거 아냐?’라는 생각도 들고, 주변인의 사회적 지위와 비교해서 나의 성취를 돌아봤을 때 나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되어 약간의 조급함? 그리고 막연함을 느꼈다. 특히 자격지심에도 물이 올랐는데, 딱 이틀 전에는 별거 아닌 이유로 엄마와 다퉜다.
나에게는 타지에서 교사일을 하는 언니가 한 명 있다. 며칠 전에 날씨가 추워져서 언니는 엄마에게 겨울이불 좀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엄마는 이불을 열심히 찾아냈고, 자식들 이불은 모두 분홍색으로 구매했기 때문에 누가 첫째 것인지 둘째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럼에도 자식들이 네 거냐, 내 거냐 따지는 문제에 예민했기에 집에 있는 나에게 물어봤다.
안타깝게도 도톰한 깔개 이불은 하나밖에 없었다. 왜인지 모르겠으나 하나였다. 그리고 그 깔개 이불은 내 것이었다.
엄마는 ‘언니에게 보낸다?’라고 의례적으로 물었고,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내 이불과 세트인 것은 택을 보고 확인한 것이었다. 별거 아닌 건데 당연히 보낸다는 것에 동의한다고 생각하는 게 서운했다.
엄마는 종종 ‘언니는 혼자, 밖에 나가서 사니까.’라는 말을 했다. 언니는 혼자, 밖에 나가서 살기가 더 이득이 있기 때문에 스스로 선택했다. 나는 거기에 별로 설득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거 내 거 맞는데?”라고 했다. 엄마는 “언니는 밖에 혼자 사니까 보내줘야지.”라고 어리광 부리는 듯한? 고집부리는 내가 귀찮다는 듯이 대답했다. 뭐 이런 걸로 그러냐는 듯이.
그래서 나는 역시 더 고집부렸다. “아냐, 그거 내 거 맞으니까 엄마가 언니랑 잘 얘기해 봐요.”라고 말했다.
솔직히 경제적으로는 언니가 이불을 못 사는 형편이 아니다. 그런데 왜 내 이불을 언니에게 줘야 하나?
엄마의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밖에 떨어져 살기 때문에 필요한 게 있다고 하면 ‘없다’라고 말하기보다 어떻게든 해결해주고 싶은 마음, 머리로는 잘 알겠다. 엄마의 마음이라는 것도 잘 알겠다. 단지 나는 엄마의 마음을 나에게로까지 적용하려는 엄마의 태도가 거북했다.
언니의 깔개이불은 (문자 그대로) 없다,라고 전달한다고 해서 문제 될 일은 없을 것이다. 둘이 잘 이야기해서 새로운 깔개이불을 마련한다던가, 없이 지낸다던가, 둘이 해결할 수 있는 안건인데 왜 내 깔개이불의 ‘양보’를 종용하는 건지 기분이 상했다. 엄마가 유독 거절하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어서 그런가, 그래서 나에게 엄마의 감정 같은 걸 떠안기는 건가, 내가 생각이 깊어진 것일까, 내가 언니에게 자격지심을 느껴서 별거 아닌 ’ 깔개이불‘을 건네주기 싫은 탓인 걸까…
아무튼 간에 나도 언니가 밖에서 춥게 생활하는 걸 원치는 않기에 그 이불은 언니에게 갔다.
엄마가 자매 간의 문제에서 사건을 해결하는 방식은 ‘가장 간단한 방식’을 선호했다. 가장 감정적으로 무뎌 보이는 한 사람이 양보하고 빨리 문제를 매듭짓는 것. 특히 다른 한쪽이 유난하게 말발도 좋고, 따지는 것도 따박따박 따지는 편이기 때문에 그럴지도 모른다. 덜 피곤해지는 방식으로. 혹은 아픈 손가락이던가.
언니는 엄마에게 아픈 손가락이 맞았다.
언니가 집에 오면 제대로 대접해주지도 못하는 걸 마음 아파하고 있었다. 혹은 언니가 말하는 동료 선생님들보다 좋은 형편이 아니라는 점에서 미안함을 느끼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언니는 엄마아빠에게 종종 동료선생님 신혼집 얘기, 차 얘기, 결혼식장 얘기 등을 허물없이 했으니까. 아니, 사실 그것 말고도 엄마는 언니에게 ‘애처로움’을 느끼고 있는 것 같다. 아빠와 언니는 견원지간처럼 몇 년 전까지는 거의 매일 다투다시피 살았고, 나 역시도 성인기가 되고 나서는 언니와 친하게 지내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으니까.
그렇다고 아빠와 나 사이가 돈독하다던지, 그런 것도 아니다. 그리고 언니는 말을 잘 참지 않는 편이라 아빠가 시대착오적인 말을 하면 그곳이 어디던 사사건건 바른말을 하는 타입이었기에, 그런 이유로 아빠와 언니는 말다툼을 하다가 서로 감정이 상하는 관계였을 뿐이다. 나는 그 사이에서 피로감을 느끼고, 언니에게 서운함을 느낀 적도 있다. 하지만 여느 자매와 크게 다를 것도 없어 보인다.
아무튼 간에, 우리 사이에는 그다지 요란한 환영인사 같은 것도 없다. 언니는 그런 요란한 환영과 뜨끈한 온기를 가족에게 기대하곤 해서 늘 실망만 안고 돌아갔다.
언니가 엄마의 아픈 손가락이라는 걸 알게 된 건 엄마가 위 내용을 이야기하면서 “그런 언니가 짠하지 않니?”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솔직히, 나는 전혀 다르게 바라본다. 언니에겐 득이 있기 때문에 나가 사는 것이고, 가족들과 의견충돌이 있을 때 관계보다 자신의 의견을 관철하는 것이 본인에게 더 이득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했을 뿐이다. 얻는 게 금전이든, 도덕이든, 자신의 윤리든, 가치관이든…
그렇게 나는 또 엄마에게서 멀어졌다.
내가 엄마의 첫 번째 순위가 아니라서 서운했던 것 같다. 심지어 엄마는 ‘언니를 미워하는 듯이 행동한다.’라고, 내가 예민하다고 말했다. 내가 언니를 미워했던 건 ‘너를 미워했었다.’라는 언니의 발언에서 출발했던 것이다. 물론 그 발언의 취지는 ‘더 이상 네가 밉지 않다. 오히려 너와 동맹이다.’ 이지만 오히려 나에겐 악영향인 발언이었다. 당시엔 내가 힘들었기 때문에 가까운 언니조차 나를 작게나마 미워했다는 게 믿기 싫었다.
그 외에도 ‘너는 가까이 살기 때문에 필요한 게 있으면 바로바로 도울 수 있는데 언니는 그게 아니잖니 ‘, 이런 말에 내가 동의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나는 엄마와 가까이 산다고 해서 정작 필요한 도움을 구하고 있다고 느끼지는 않았다.
가족에게 너무 집착하게 되는 것은 그리 즐겁지 않다. 감정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가족에게 집착하게 되는 것 같아서 이만 말을 줄인다. 이렇다고 해서 엄마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잘 안다. 내가 좀 사려 깊지 못한 것 같다. 그래도 후회스럽진 않고 이렇게 행동하고 싶었다.
엄마는 ”내가 어떻게 하면 좋겠니? “라고 물었다. 나는 ”언니에게 이불 가져다주면서 이거 동생 이불인데 너에게 더 필요해 보여서 가져다줬어. “라고 엄마의 마음을 말하라고 조언했다. 가져다주고 싶은 건 엄마 마음이고 사실 그대로를 언니에게 말하고 싶었다. 왜 이렇게 어른스럽고 사려 깊게 행동하기를 기대하는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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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도움받기 싫어하는 것 같다. 우선순위에서 밀리기 싫어서 평소에 도움받고 살면 나는 필요할 때 도움받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해서 더 내 몫을 하려고 하는 것 같다. 공평해지기를 바라고,.. 아무튼. 나는 내가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게 문제다. 상대가 밀었으면 나도 반대편에서 같이 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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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도 아침에 주 4일 달리기를 한다. 날이 추워져서 트레드밀에서 실내 달리기만 하고 있다.
며칠 전에는 한 번도 안 쉬고 6.4km를 달렸다. 달릴 때 팁이 있다면 무작정 빠른 속도로 달리면 빨리 지치게 되기 때문에 느리다 싶은 속도로 달리기 시작하는 게 좋다. 그러다가 적응되고, 트레드밀 앞에서 머물게 되면 조금씩 속도를 높인다. 그러다 보면 편안하게 오래 달리게 된다.
그리고 꼭 계속 달리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있으면 집을 나설 때 도움이 된다. 그래도 한 번 발걸음을 떼면 머리 구석까지 산소가 운반되는 상상을 하며 공기를 들이마시고, 내뱉고 그 과정자체가 건강해지는 느낌이라 될 때까지는 계속 달리게 된다.
올해 6월 말부터 계속 이런 식으로 달렸다. 몸에 생긴 변화는 체력이 눈에 보이게 늘었고, 배에 복근이 좀 보이게 됐다. 감정기복도 줄었고, 전체적인 몸의 에너지도 올라갔다. 특히 걸어 다닐 때 조금 더 빨라진 것 같다. 엉덩이 근육이 발달해서 그런 것 같다. 다리도 단단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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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신문을 구독하고 있다. 오늘 눈에 띈 헤드라인은 ’ 코딩보다 수리공…‘이다.
AI가 붐은 붐인가 보다. 하긴 그렇다. 시나브로 계속 바뀌어왔으니까. 특히 스마트기기 같은 것들. 어떤 영향을 불러올지 모르지만 계속 바뀌고 있다. 내년에 빅테크 회사들이 투자금을 많이 필요로 할 것이라고 추정해서 그 돈을 공급해야 하는, 혹은 투자할 생각이 있는 사람들은 기존의 주식을 (대량으로) 팔고 현금을 최대한 보유하는 형국이라고 하던데 앞으로 어떤 식으로 흘러갈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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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에 안 좋다는 것을 먹으면 참 죄책감이 든다. 마치 주말에 미뤄둔 집안일을 미루고, 미뤄서 어둠이 찾아올 때 드는 느낌이랑 비슷하다. 지금은 마시멜로스노 아이스크림초코라는 음료를 마시며 그런 기분을 느끼고 있는 중이다. 이 음료는 죄가 없다. 딱 내가 좋아하는 맛이다. 눅진한 초코크림 케이크를 한 술 크게 떠먹는 느낌, 위즐이라는 엄청 꾸덕한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퍼먹는 맛이다. 엄청나게 달고, 진하다. 그리고 당류가 67g이다. 이 음료를 드신다면 꼭 매장에서 유리컵으로 받아서 드셨으면 좋겠다. 엄청나게 달고, 엄청나게 양도 많다.
그럼에도 나는 왜 이 음료를 마시고 있느냐면, 기분이 안 좋아서 이거라도 마시면 좋아질까 싶어서 그렇다. 하지만 역시나 경험에서 배웠듯이 이걸 다 마시고 드는 죄책감만 남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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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고 싶은 나는 너무나 많았다. 그 나이 대에 알맞게 행동하는 사람, 어른답게 살아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심하게도 나는 5년 전에 했던 고민을 올해에도 하고 있었다. 10년 뒤에도 똑같은 고민을 하고 있으면 너무나 수치스러울 것 같아서 눈물이 난다. 그런데도 나는 잘 변하지 않는다. 안 좋은 쪽으로 변하는 건 왜 이렇게 쉽고 좋은 쪽으로 변하는 건 왜 이렇게 멀어 보이는지. 어질러지는 건 쉬운데 정리하는 건 노력해야 한다…
차라리 잘 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되고 싶은 나는 언제나, 언제나.. 고통 같은 건 모르는 얼굴로 타인들 앞에서 자랑스럽게 살아가는 밝은 표정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렇다고 내가 고통을 잘 안다거나 힘들게 살아왔다던가 그런 것도 전혀 아니다. 사실 나에겐 문제가 없다는 게 문제다. 스스로 문제를 만들어낸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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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에 있어서도 그렇다.
날 선 말을 뱉어내고 모진 말을 꾸역꾸역 가슴에 담아서 관찰하는 것도.
죄책감을 느낄 것을 알면서도 어리석음에 못 이겨 내 입에 단 것을 찾는 것도.
나는 왜 이렇게 자라지 않는 걸까.
나이가 더 들면 이불깔개로 서운하지 않을 수 있게 되고 싶다.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