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yudejakeiru - 실리카 겔
화면에 글씨가 와르르 쏟아진다. 우르르,.. 와르르.. 이게 갑자기 무슨 말이냐, 하실 수 있겠으나 문장 그대로다. 그동안 하고 싶은 말을 담고 쌓아두고 키보드 위에 손을 얹으니 흰 공간에 자음과 모음이 우르르 쏟아져내린다. 이건 좀 문학적인 표현을 차용한 것이고, 요즘 아이패드에 문제가 있어서 그렇다. 충전기를 꽂은 상태에서 터치를 하려고 하면 터치가 잘 인식되지 않기도 하고, 충전기를 꽂은 상태에서 타자를 치려니 입력한 순간에 딜레이 없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출력되지 않는다. 잠시 멈칫,.. 했다가 글씨가 쏟아져 나오는 것이다. 댐에 갇혀있던 물이 메마른 강줄기에 쏟아져 나오듯이 글씨가 촤르르르…
*
2월 달에는 메모를 참 많이 했다. 많이 했다고 생각해서 다시 노트를 되짚어봤는데 그리 많이 하지 않았다. 내 손 크기보다 약간 큰 노트북의 15장 정도를 썼다.
주로 현재에 어떤 일이 있었고, 그에 대한 내 생각과 감정을 간략하게 적는 식이다. 검은색 모나미 플러스 펜으로 슥슥 적는데 이 펜이 참 적을 맛 나는 펜이다. 뒷면에 살짝 비치긴 하지만 슥삭, 사각사각 적는 맛이 있고, 볼펜처럼 미끄럽지도 않고 잉크펜처럼 종이를 긁는 느낌이 나지도 않으며 샤프처럼 흑연이 묻어나지도 않는다.
그 외에 책을 읽고 기억해두고 싶은 문장 같은 걸 간추려 쓰기도 한다. 이땐 파란 모나미 펜을 쓴다. 0.7mm 두께로 글씨가 써지는데 두툼하니 부드럽게 써진다. 볼펜 중에서도 삼색볼펜같이 올인원 형식의 볼펜은 간편하지만 손에 쥐고 있으면 당장 쓰지도 않을 이외의 2가지 색의 무게를 들고 있어야 하는 게 왠지 손해 보는 것 같아서 하나에 한 가지 색만 있는 이 펜을 자주 사용한다.
불평 같은 건 가진 펜 중에 가장 얇은 0.38mm짜리 검은색 문화볼펜으로 적어두고, 그 외에 꿈이나 공상 같은 건 연필로 적는다.
*
메모에는 원칙이 있다. 떠오르는 생각을 거르지 않고(판단하지 않고) 다 적는다. 누가 보면 문제가 생길 수 있는 문장도 가감 없이 적는다. 이를테면 내 인성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할만한 생각도 적고, 뭐가 싫거나 맘에 안 들었으면 그걸 적는다. 쓰고 보면 나는 참 예민한 사람이다. 거슬리는 것이 많다. 소음, 미적 가치 같은 것에도 굉장히 예민한 걸 느꼈다. 쉽게 혐오라는 감정이 차오르는 사람이다.
*
요즘 가장 인상 깊게 읽은 책은 <뇌는 어떻게 나를 조종하는가> (크리스 나이바우어, 김윤종 옮김)이다. 이따금씩 삶에 번뇌가 많아져서 괴롭다면 이 책을 추천드린다. 아래 메모는 책을 읽으면서 파란 펜으로 필사한 내용인데, 밀리의 서재에서 전자책으로 읽은 것이라 페이지 수가 종이책과 다르고, 중구난방일 수 있음을 말씀드린다. 심지어 완전히 똑같이 메모한 것도 아니고, 내 멋대로 줄이거나 간추린 내용도 있으니 궁금한 내용이 있다면 책을 읽길 권합니다.
*
좌뇌는 일종의 해석장치다. 중요한 것은, 때때로 완전히 틀린 설명을 한다는 것이다. 오직 상황을 그럴듯하게 설명하기 위해서.
해석하는 마음은 항상 모든 사실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설명을 만들어 낸다.
“나는 추측했을 뿐”에서 ‘나’는 온전한 나가 아니라 마음의 해석장치의 일부라는 점이다. … 그렇다면 이 ‘나’의 자기 자신에 대한 판단도 틀릴 수 있지 않을까?(57p)
자아란 삶에서 무수히 일어나는 사건과 행위와 경험을 일관성 있게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하나의 이야기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메뉴를 음식으로 착각하지 말라.
좌뇌가 현실이라는 지도를 제작하는 데 중심역할을 하며, 지도를 그릴 때 사용하는 펜이 바로 언어. … 좌뇌는 언어에 너무 의존한 나머지 현실을 그린 지도를 현실 그 자체로 착각하기 시작한다.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서 언어의 상징성을 점점 더 진지하게 받아들이게 되자 …) … 머릿속 목소리를 진짜 당신으로 착각하는 순간, 도구가 당신을 사용하는 상황이 된다. 언어는 일종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며, 이 이야기에 당신의 기억과 머릿속의 명령센터가 존재하는 듯한 감각이 합쳐지면 지구상의 거의 모든 사람이 겪는 ‘자아’라는 환상이 창조된다. (73p)
범주(좌뇌의 기능, 범주화)는 우리의 정신적 표상에 불과하다.. 는 점을 잊지 않는다면 유용.
오직 마음속에, 그것도 우리가 그것을 인지할 때만 ‘어떤 것’으로 존재, 모든 문제는 이것이 마음속뿐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을 때 발생.
좌뇌의 범주화 기능은 집착에 가까울 정도, 스스로를 옭아매는 경우가 많다.
생각한다는 것은 곧 범주화하며 정보를 처리한다는 뜻이고, 여기서 벗어나는 방법은 없다.
믿음을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이 과학의 입장이기 때문에 ~~ 임상실험에서 플라세보나 대조군을 설정.
어느 시대에나 사람들은 신념을 위해 죽을 수도, 죽일 수도 있었다. 단, 모든 신념이 그런 것은 아니고 자신이 믿는 바가 단지 신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망각할 때만 그렇다.
정체성이란 시공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의 패턴에 불과하다. 패턴을 바꾸면 사람이 바뀐다. - 니사르가닷타 마하라지.
자아는 생각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경향성이 있는데, 이는 불교에서 파악한 자아의 특징이기도. 동양의 성인들은 마음이 이런 식으로 끊임없이 이야기하려는 이유가 그것이 존재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기 때문.
고통. 우리가 더 나은 내가 되고자 그렇지 않은 나를 배척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슬픔, 실망, 고뇌라는 감정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좌뇌는 단지 자기 할 일을 할 뿐, 그러나 우리가 좌뇌와 완전히 동일시하여 그것이 나 자체라고 믿을 때 고통은 압도적이다. 요령은 나의 생각과 나를 분리하는 것. 그래서 생각은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생각은 ‘마땅히 따라야 할 것’이 아니라 그저 ’ 일어날 뿐인 일‘로 본다.
침묵은 신의 언어, 그 외 모든 것은 형편없는 번역일 뿐. - 루미
좌뇌를 조종간에서 내려오게 하는 건 의식적인 호흡.
생각은 또 다른 꿈의 세계.
내가 점수를 땄을 때 나는 아무 생각도 하고 있지 않았다. 단지 그냥 스파링을 했을 뿐. 그런데 ‘이기면 얼마나 멋질까’라는 생각이 떠오르자 동작은 급속도로 둔해졌다. 다른 생각이 떠올랐어도 결과는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생각을 했다는 것 자체가 몸이 느려진 원인이다. (144-147p)
언어, 개념, 신념, 패턴, 이름표에 기초한 추상화된 세계에서 산다는 건, 현실이 아닌 꿈 속에서 사는 것과 같다.
아들의 축구시합 -> 다른 아빠와 잡담.
일이 얼마나 스트레스가 심한지 서로 이야기하던 중, 대부분의 스트레스가 소설이나 다름없는 허구적 이야기를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여서 생긴다고~
‘저 밖에’ 축구대회란 없고, ‘저밖에’ 축구팀이란 없으며, 골을 넣어 점수를 낸다는 것도 없음을, 이 모든 것이 우리 머릿속에서 지어낸 일단의 이야기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저 밖에’ 있는 것은 오직 꼬마 애들 한 무리가 사방으로 뛰어다니며 공을 차는 것이며, 그 외의 모든 것은 우리가 만들어 낸 이야기일 뿐이라고. 우뇌의 현실에선 승자도 패자도 없고 팀도 대회도 없다. 거기 있는 것은 오직 존재함과 그리고 행함뿐이다.
여백, 침묵, 공간, 직감.
*
태어나서 나는 죄의식을 집어삼키며 살고 있었다.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해서, 상상했던 내가 되지 못해서, 목표했던 바를 이루지 못해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실망감을 주어서...
어딘가에 빚지고 있단 기분은 늘 내가 정말로 바라는 것이 우선순위가 될 수 없게 한다.
좌뇌는 이런 식으로 설명하곤 했다. 지금 살고 있는 이 삶에 더 이상 감사하고 있지 않을 때, 내가 바라던 삶은 이게 아니었다고 생각할 때.
<마음의 양식.>
*
할머니의 손등을 쓰다듬었다.
주름지고 부드러운 손. 더 이상 논밭에서 작물을 돌보지 않고, 음식도 직접 하지 않아 아이처럼 뽀얗고 살캉해진 손등. 할머니는 언제나 나의 태양이었다. 하늘을 바라보지 않아도 날이 밝아오고 사물이 선명해지면 그건 태양 덕이었다. 어린이는 다 큰 어른이 되어서도 보호해 준 사람을 잊지 못한다. 난 할머니 앞에만 가면 늘 어린이였다. 당신한테 갚을 고마움을 아직도 마음에만 담고 있는 내가 너무 무력하게 느껴졌다. 그 오후 내내 손등만 쓰다듬었다. 할머니에게 말을 걸면 대답을 하긴 하지만 옆에 있는 나를 그저 사물처럼, 그저 멍하니 앞만 바라봤다. 나는 어릴 때 할머니가 나를 어떻게 돌보아줬는지를 기억한다. 그래서인지 치매에 걸린 뒤 멍하게 앞만 보는 할머니를 보면 괜히 덜 자란 나만 탓하게 되는 것이다. 아직까지도 이렇게 덜 자라서, 왜 나는...
*
사촌동생들을 오래간만에 봤다. 두 아이들은 벌써 청소년보다 청년에 가까워졌고, 약간 징그러웠다(긍정적으로). 성장기는 왜 이렇게 기괴한 것일까. 올챙이에서 개구리가 될 때 꼬리는 그대로고 뒷다리가 쑤욱 나오는 과정을 보는 것처럼...
사실 시간을 징그러워하는 것 같기도 하다.
*
또 다른 사촌동생들은 나보다 대여섯 살은 어린 친구들이 있다. 세 자매인데 나는 그 셋 중 첫째가 나에게 생긴 첫 사촌동생이라서 어릴 때부터 굉장히 좋아했다. 언니가 나에게 그랬듯이 같이 놀고, 말 걸고, 하자는 거 같이 해주고... 그래서인지 오래간만에 봤는데도 그렇게 어색하지도 않고 편안했다.
그 세 자매들을 보고 있으면 옛날 단짝친구가 떠오른다. 그 친구도 세 자매 중 첫째였는데, 그 친구도 이런 식으로 지냈을까, 생각하게 됐다.
세 자매들은 모여서 꽤나 소소한 이야기를 했다. 모바일 게임, 오늘 먹고 싶은 음식(나는 핫초코가 먹고 싶다고 했고 세 자매 중 둘째도 오늘 아침에 핫초코를 먹고 싶다고 했다.), 에그타르트 맛집을 찾고 있다(첫째), 아니다, 에그타르트보다 휘낭시에가 맛있다(둘째), 나는 마카롱도 좋아한다 그리고 파리바게트 마카롱이 맛있더라(이건 셋째), 마라탕은 탕화쿵후보다 미미가 맛있더라(둘째), 마라탕을 먹은 기억이 오래됐다(셋째), 곧 마지막학기 시작되는데 아아아아악,ㄱ,,(첫째), 나는 이번 주 주말에 부산여행 가는데(둘째), 나는 네일아트 하려고 손톱 기르고 있다(셋째), 나도 내일아트 해봤는데 생각보다 불편했다(첫째), 나는 네일아트 안 해봤는데 해보고 싶다(나), 손톱 하는 친구 있는데 엄청 예쁘게 잘한다(라고 말하며 네일아트 사진을 보여줬는데 벚꽃색 네일아트가 굉장히 정교했다)(둘째)...
그러다가 나는 괜히 슬퍼졌다.
너희가 나보다 더 책임감 있고 언니 같아..라고 말하다가 "먼저 철들지 말아 줘",라는 철없는 소리를 해버렸다. 나는 아직도 어른이 되기 싫은 어른이 되었는데, 이렇게 책임감이 없어서 지금까지 나는 직업이 없는 건가, 생각하다가도, 마냥 불평하고 싶다가도 더 이상은 이럴 순 없다고,.. 고3의 책임감(셋째가 고3이다.)을 배워야겠다며,. 하여간 별소리를 다했다.
난 아직도 내가 고3 같은데.
자꾸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지금의 내가 자신이 없어서 그런 것 같다. 자신 있게 살아야 하는데.
괜히 너 아직 어리다고, 그런 말이 정말 '위로'로 들려서 그게 더 슬펐다. 그걸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 게 슬펐다.
그래도 다들 응원해 주시니 감사했다.
*
나는 좀 칠칠맞지 못한 편이다.
최근에는 필기시험을 보러 갔는데 장소를 전혀 다른 곳으로 알고 있어서 전혀 다른 시험장에서 대기할 뻔했다. 물론 출발하기 전에 그 주소를 지도어플에서 확인했기에 사건이 되진 않았다.
그래서인지 주변에서도 나를 위한다고, 더 챙기고 확인하려는 면이 있다. 뭘 잘하고 있는지, 해야 할 건 했는지... 그래서인지 나는 아직도 내가 다 못 큰 것 같다고 느낀다.
*
나는 날 적극적으로 예뻐하는 사람이 아니면 좀 수줍음을 탔던 것 같다. 생각해 보면 나를 대놓고 "좋아해!"하지 않으면 좋아하는 줄 몰랐던 것 같다. 하지만 은은하게 잘해주는 것도 굉장히 예뻐하는 방식임을 최근 느꼈다.
큰아버지, 둘째 큰아버지는 드러내놓고 "예쁘다, 잘한다." 하는 스타일도 아니고 용돈을 주시는 스타일도 아니다. 그냥 늘 그 자리에서 계셨다. 추석 때 전 부치러 가도, 할아버지 제사 때 전 부치러 가도, 설날 때 전 부치러 가도,... 지금 돌이켜보면 뭔가 잘해주시려고는 하는데 뭘 어떻게 해줘야 좋아하는지 몰라서 잘해주지 못하는 느낌이다.
나는 외갓집에 가면 늘 "너는 이것도 잘하고, 저것도 잘하고, 동생도 잘 챙기고, 예쁘고..." 온갖 수식어구가 붙기도 하고 하여간 그냥 '우리 강아지'로 환대받는 입장이었다. 그러니 외갓집에 가면 기가 살아서 여기저기 활개치고 다녔다. 그래서인지 비교적 은은한 온도인 친가에서는 어릴 적부터 내가 환영받고 있다고 인식하지 못했고, 친가에만 가면 예의 바르게 행동하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하지만 최근 느끼는 건 이런 어른도 저런 어른도 있다는 것. 큰아버지랑 둘째 큰아버지랑 소소하게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지 묻고 대화하니 그냥 그것만으로도 생각보다 즐거웠다. 좋은 명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