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에 대한 이야기

내 얘길 들어봐 - 파파야

by 이오십


도서관 열람실 책상 위에 엎드려 잠을 잔다. 도서관에서 잠을 자는 사람을 보면 속으로 “잠은 집에서나 주무시지.” 했었는데 신세가 바뀌었다. 쏟아지는 봄볕에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마지못해 항복하듯이 스르르 정신을 놓아버리는 게 무엇과도 비교하기 힘든 행복이라는 걸 안다. 물론 너무 오랫동안 자고 일어나면 고개를 들었을 때 민망해진다. 공용공간에서 이토록 깊은 잠이라니. 하지만 너무 행복하다.


오늘은 15분만 자야지, 하던 게 엎드려서 1시간 반이나 잤다. 손목시계의 알람을 15분 간격으로 맞춰놓았으니 최소 다섯 번 알람을 끄고 다시 잔 셈이다. 자고 일어났을 때 개운함을 느끼는 잠이 있는데 오늘이 딱 그 잠이었다.


IMG_7107.jpeg 아보카도 씨앗을 드디어 화분에 심어줬다. 그동안은 물안에 빠트려놨었다.


우리 집은 잠을 경계해야 할 것으로 여긴다. 잠을 자고 있으면 생애 할 일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다,-라고 아버지는 늘 말씀하셨다. 아버지는 생에 이룰 일이 뭐 그리 많은지 활동량이 많았던 날에도, 저녁에 상갓집을 다녀와 열두 시가 넘어 들어온 날에도 새벽 네시 반이면 반짝 일어났다.


그런 집안에서 기특하게도 나는 꽤 잠이 많은 편이었다. 어릴 때부터 잠이 많았는데, 초등학생 때는 저녁 9시면 눈꺼풀이 고장 난 셔터처럼 반쯤 내려와 눈앞을 가렸고, 당연히 10시면 내가 있는 곳이 집이든 차이든 그냥 자고 봤다. 가끔 부모님의 퇴근이 늦어져 차에서 깊이 잠든 날에는 아버지가 나를 업고 집에 데리고 가기도 했고, 대개는 가족들 중 가장 먼저 이불속으로 들어가 아늑함을 느끼며 잤다. 내게는 잠을 잘 때 꼭 필요한 물건이 있었는데, 손수건이었다. 손수건의 모서리를 검지손가락으로 매만지면서 잤다. 손수건의 가장자리의 감촉은 부드러웠다. 손수건이 없으면 엄마의 머리카락을 만지며 잤다. 하도 머리카락을 만지며 자니까 엄마가 엄청 피곤한 날에는 ”머리 그만 만지고 자.. “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그 얘기를 들으면 왠지 서운했지만 엄마의 머리카락 없이도, 손수건 없이도 금방 잠에 들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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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식은 죄악이다,라는 아돌프 루스의 말을 변용하자면 우리 집은 잠은 죄악이다, …

어쩌면 내가 크게 오해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게으름은 죄악이다, 로 바꾸겠다. 왜냐하면 생각해 보니 아버지는 잠을 많이 자는 걸 뭐라 한다기보다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것에 대해 싫어하는 걸지도 모른다. 아니다, 아니다…. 왜 나는 이렇게 아버지의 시각에 얽매여 잠의 제약을 쫓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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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억지로 깨워서 일어나는 아침을 가장 싫어한다. 거실에서 아버지가 큰 소리로 “이제 일어나야지!” 하는 것 말이다. 당연히 세상엔 일어나야 할 시간이 사회적 약속처럼 정해졌지만(그런 것 따위 없는 시계 발명 이전의 시대가 그립기도 하다.) 그런 식으로 잠에서 깨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붙는 말은 “왜 이렇게 못 일어나지? “, ”좀 일찍 좀 자지(어제로 시간을 돌릴 수도 없는 일인데..)“ 등이다. 정말 웃긴 점은 나는 학교에 절대 지각해 본 적이 없다. 학생 때의 90%의 아침을 이런 식으로 맞이했는데 속으로 나는 ‘아빠는 참 호들갑이다’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학교 등교 시간이 여덟 시 반까지이면 나는 일곱 시 오십 분까지 자고, 대충 씻고 밥은 생략한 채 여덟 시 십 분까지 현관문을 나서면 지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랬다.


근데 좀 크고 나서 돌아보니 아빠는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알겠다. 아빠는 늘 우리 집에서 출퇴근을 담당하는 사람이었다. 차로 언니와 나를 학교에 태워다 주고(초등학생 때까지는), 엄마를 사무실로 태워다 주는 임무가 있었는데 집에서 나오는 시간이 늦어질수록 지각을 방지하기 위해 아빠가 담당해야 하는 시간은 촉박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그렇지, 토요일, 일요일 아침 여덟 시에 깨우는 건 좀 서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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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이 되고 나서는 허겁지겁 잠만 잤다. 특히 기숙사에 들어가고 나서는 나를 깨워주는 사람이 없었는데, 그게 너무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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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생 때는 밤 열 시에 자서 아침 여섯 시 반이면 기상하는 터라 아빠의 기상알람을 내가 끄기도 했다. 중학생이 되고 나서 학원에 다니고, 의무감이 생기면서 열한 시에 자고 일곱 시에 일어나게 되었다. 가끔은 열두 시에도 잤다. 고등학생이 되고 나서는 새벽 한, 두 시까지 깨어있다가 아침 일곱 시에 겨우 일어나기도 했다. 생각해 보니 자랄수록 엉망이었다.


나는 이걸 사회의 음모로 바라봤었다, 한창 이 모자란 잠에 불평이 많았을 때 말이다. 회사가 불이 켜지고 꺼지는 시간에 맞추어 인간을 ‘교육’시키고 ‘훈련’시켜서 발전시키는 무자비한 거대자본 메커니즘의 음모라고.. 근데 내가 뭘 할 수 있겠나. 나는 늘 어긋나는 게 두려운 사람이라서 내 마음이 그렇게 반항적이든 말든 규칙에 순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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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라토스테네스의 체라는 걸 처음 들었을 때 ‘에라토스테네스’는 누구이며 그 사람의 ‘체’라는 건 왜 알아야 하지, 생각했다.


근데 지금 생각해 보니 이게 지금을 위한 완벽한 비유 같다. 소수를 찾는 방법을 고안한 사람이 에라토스테네스,라는 고대 그리스인이고, 체로 불순물을 골라내듯이 합성수를 차례로 지워나가며 소수만을 남기는 방식을 고안해서 ‘체’라는 게 붙은 것이다.


나는 농촌에서 살았던 기억이 있는데 그곳에서 할머니가 쌀과 돌, 쭉정이를 체로 거르는 걸 봤었다. 모래 알갱이, 길쭉한 잡초, 쭉정이, 날벌레 같은 것들이 걸러지고 쌀알이 체 위에 남는다.


세상에도 다 그런 규칙이 있다. 체로 다 걸러낸다. 사람을 불순물, 쭉정이, 모래알갱이 따위로 비유하는 게 옳진 않겠으나 어릴 때부터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나는 꼭 쌀알이었으면 좋겠다고. 끝까지 살아남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선택받은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 누구에게서?), 그 목적에 알맞은 사람이 되고 싶다, 이런 생각들 말이다. 세상이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그런 건실한 생각을 초등학생 땐 참 많이 했다. 그리고 그땐 옳고 그름이 선명하고 흑과 백만이 있는 세상을 살고 있었기 때문에 (초등학생에게 도덕을 가르치려면 확실한 명암을 두는 게 필요하니까) 쌀알만이 가치 있다고 느꼈다.


지금 느껴지는 건 정반대다. 체로 거르는 건 그 목적에 맞는 것을 고르기 위한 과정일 뿐이고, 사실 세상에는 체 같은 게 없다.


도태되는 것도 없다. 다만 지친 인간만 있을 뿐이다.


…라고 말하지만 나는 아직도 도태되는 게 두렵다. 혹은 이런 식으로 생각해야만 삶에 발전이 있다고 믿는 게 결과론적으로는 풍성한 삶 아닐까, 생각하기도 한다. 나는 그래서인지 아침에 늦게 일어나면 기분이 안 좋아진다. 잘 자고 일어나면 그 나른함을 즐기면 될 일인데 ‘난 참 게으른 인간, 벌써 시작점에서 도태되었어’라고 스스로 느끼게 되니 말이다.

이래서 사람에게 세계관은 얼마나 세뇌적인 것인지 다시금 생각하고, 이게 내 삶의 전반을 지배하는 건 어쩔 수가 없다고 느낀다.


IMG_7151.jpeg 팝콘은 캐러멜 팝콘이 제일이다. 왕과 사는 남자를 보러 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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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에는 잠을 잘 못 잤다. (내 기준으로 보면 못 잔 편인데, 아마 내 수면의 질은 평균 이상일 것이기 때문에 남들보다는 꽤 잘 잤을 것이다. 나는 돌봐야 할 가족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애가 있는 것도 아니고, 가야 할 회사가 있는 것도 아니고, 해야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나는 내가 잘 못 잤음을 어떻게 인지하냐면, 글을 읽을 때 문장을 이해하는 속도가 확연히 느려지고 약간 사람이 부정적인 상태가 된다.


어제 샤워하다가 문득 살아있다는 게 잔인한 이유가 된다는 걸 생각했다. 왜냐하면 선택하지 않는 것조차 삶에서는 선택이기 때문에 살아서의 변명은 공허한 울림일 뿐이다. 세상에 선택할 수 없는 게 얼마나 많나. 주어진 가정환경, 유전적 기질, 태어난 시점, 태어난 장소, 노화, 타인의 감정과 판단, 이미 일어난 과거, 자연재해, 전쟁, 경제 공황… 하여간 삶에서는 방관조차 선택이 되고, 회피조차 선택이 된다. “나는 고른 적 없어!”라는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이 잔인하다. 어려울지언정 용기내야할 땐 꼭 용기를 내야 하고, 고통스럽더라도 끊어야 할 땐 확실하게 잘라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능동적인 인간은 그 얼마나 삶이 비극인가.

적극적인 인간은 당장의 선택에 확신이 없고 불행을 겪을지언정 그 선택의 이유를 알기 때문에 받아들임이 훨씬 수월하지 않을까.

이왕이면 확신이 없고 무섭고 힘들어도 적극적으로 골라보는 게 낫겠다. 물론 고른다고 생각하지만, 고를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또 착각이겠다.


이래서 사람들이 소설을 읽음으로써 삶 전반에 비극과 희극은 뒤섞여있다는 것을 알게 하나보다. 세상의 모호한 지점을 바라보고, 언제나 옳은 건 없고 세상엔 사기꾼이 가득하다는 것을 지혜롭게 알도록 하나보다.


삶의 모서리에는 뭐가 있는가. 실은 한 권의 책이었나. 얇은 한 장의 종이인가. 베일 것 같은 날카로움인가, 부드러운 곡선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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