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오십 Oct 14. 2023

최선을 다하면 죽는다.

루시드 폴, ‘오 사랑’

아아.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다. 솟아오르는 식욕과 동시에 차가워지는 계절 앞에서 왠지 사색을 하게 되고 대화를 나눌 상대가 필요해져서 괜히 책을 들었다 놨다 한다. 무엇보다 시험공부 앞에서 책만큼은 죄책감이 덜어지고 가장 재미있는 유흥이 아닌가…라고 기사실기시험을 한 달 앞둔 사람이 이야기한다. 도서관에 가서 400원짜리 모나미 153 스틱을 쥐고 무아지경 하얀 a4를 검은 글씨로 채워가다 보면 ‘꽤 적지만 꽤 많은 걸 알게 되었다’는 뿌듯함과 동시에 ‘그래서 더 열심히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막막함, ’ 나는 무얼 위해 이 짓(?)을 하고 있는 건가.‘라는 공부 하면서 빠지면 안 되는 회의감을 느끼기도 한다.



 하루 종일 한 일이 도서관에 앉아서 공부만 했다는 사실이 허탈감을 선물할 때, 그때가 바로 다른 일을 시작할 타이밍임을 알려준다.

 주로 산책을 하거나-도서관을 빠져나와 집으로 가는 길도 산책이라면요..-, 이어폰에서 나오는 kpop을 들으며 러닝머신을 30분 동안 열정적으로 탄다. 그것도 하기 어려울 정도로 늘어져있고 싶다면 생각나는 싶은 음식을 챙겨 먹는데, 그것도 힘들다 싶으면 불도 켜지 않은 원룸 바닥에 자빠져서 라디오를 켜고 가만히 누워서 유튜브를 보며 쾌락을 느낀다.

 최근에는 새로운 휴식 루틴을 만들었다. 책상 앞에서 이해하고 암기해야 하는 의무감을 주는 책 말고 읽고 싶은 책을, 읽고 싶은 만큼만 읽는 것이다. 많으면 50p, 적으면 10p 정도 읽고 접는다. 그러면 적당히 평화로워지고 당장에 해결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던 일도 그 정도는 아니라고 재평가하게 된다.



불과 2주 전, 친구와 교보문고에 들러 책을 샀다. 진로 고민에 찌든 나는 일반인을 위한 철학 잡지 NewPhilosopher 두 권 - 용기에 대하여, 불확실성 속에서 나아가기 - 을 샀고, 친구는 ‘최선을 다하면 죽는다’라는 다소 과격한 제목의 수필을 샀다. 사회초년생이라서 새로운 사회에 진입하는 데에 많은 에너지를 쏟고 있는 걸 친구의 블로그를 통해 간간히 보고 들었기 때문에 원인 모를 두드러기가 난 손으로 ‘최선을 다하면 죽는다’라는 책을 쥐고 있는 게 자연스러워 보였다.

 친구는 일 년 전부터 여둘톡이라는 팟캐스트를 추천해 줬는데, 여둘톡 진행자 두 분 중 한 분인 황선우 작가님과 북튜버 김겨울 님이 빵빵 터지며 읽었다는 책인 전국축제자랑의 작가 김혼비 님이 쓴 편지 형태의 수필집이었다. 며칠 뒤 친구의 블로그에 올라온 독후감이 올라왔다. ’ 서정적인 몽둥이들‘이라는 안 어울리는 형용사와 명사의 결합에 참을 수 없이 궁금해졌다. 나를 글 쓰게 하는 서정적인 몽둥이라니. 작가님 두 분은 각각 리코더와 목탁이라는 서정적인 몽둥이를 가지고 있구나, 근데 또 다음 글은 무슨 이야기를 할 건가. 너무 궁금해졌다.



책은 2022년 5월 말 황선우 작가의 편지를 시작으로 보름 간격마다 편지를 주고, 받고 2023년 4월 말 김혼비 작가의 편지로 마무리되는 구성이다. 막힘 없이 편안한 문장으로 이어지는 안부 묻기, 근황토크가 이어지는데 이어지는 편지 릴레이를 통해 느낀 작가님들의 인상, 먼저 김혼비 작가는 너무너무 유쾌한 사람이다. 본인은 그렇게 웃긴 사람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따뜻한 의도로 행한 일도 웃긴 에피소드를 낳고(친구 어머니로부터 포교 잘할 인상이라는 명예로운 타이틀을 얻다뇨..!), 세상을 굉장히 재미있게 보는 것 같았다. 그리고 황선우 작가는 되게 이성적인데 따뜻한 위로를 잘 전하는 사람이었다. 장염에 걸려서 고생한 에피소드에서 나도 모르게 위안을 얻었다. 아직 젊은데도 약해지고, 늙어가는 과정이 너무 슬프고 몸이 약해지는 게 두려운데 꺾이면 꺾이는 대로 그 나름의 강함이 있을 것이라는 말에서 늙어가는 것에 용기를 얻었다.


작가님들의 언어가 재미있어서, 책을 훌훌 읽게 되었지만 사실 내용보다도 제목에 크게 끌리는 바가 있었다. 책 중반에 혼비 작가님이 번아웃 증상으로 단어를 잘 떠올리지 못해서 퀴즈쇼 같은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는 에피소드가 나왔는데 나도 크게 공감했기 때문이다.

 나 같은 경우에는 책을 읽지 못했다. 정신이 너무 닳아버려서 탄성한계를 넘은 고무줄 같았다. 쉽게 말하면 집에서 하도 입어서 고무줄이 늘어나버린 바지와도 같다는 말이다. 괜히 아는 척 좀 해보았다. 아무튼, 다음 주에 제출해야 하는 과제를 일주일 내내 붙잡고 수정, 수정, 수정하는 학생은 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나는 그게 내 최선인 줄 알았다. 4학년 조별과제 때는 민폐 끼치고 싶지 않은 마음 반, 모두에게 착한 사람이고 싶은 욕심 반 섞여서 매일 새벽 4시에 들어가고 오전 9시에 다시 모이는 극한 회의에 대해서 비효율적인 것 같다는 표현 하지도 않았다. 그저 다들 열심히 살고 있고, 나도 그것에 뒤처지지 말아야겠다 생각할 뿐이었다.

 그래. 즐기기보다 성공해서 많은 돈을 벌고 싶어서, 동기들이 나를 유능한 사람으로 봐주었으면 해서, 그렇게 안 보이는 곳에서 포토샵 무료강의를 듣고, 일러스트를 독학하고, 아이디어를 짜내고 노력했던 것 같다. 써놓고 보니 독기 가득한 야망 청년 같은데, 당시 주변인들이 나를 보면 쓰러질 것 같다며 건강을 걱정하고, 집에 안 좋은 일이 있는지 물어봤다. 안색이 어둡고, 표정은 되게 굳어있고, 목소리는 하도 쓰질 않아서 나오질 않았다. 스스로 평가하길 나는 늘 부족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더 열심히, 최선을 다해 과제를 하고, 친구를 만날 시간에 공부를 해야 한다는 긴장감으로 살았다. 다 써놓고 보니 나보다 대학을 활용하지 못하고 졸업반인 사람은 없을 것 같다.


블랙맘바가 만들어 낸 환각퀘스트,

에스파, ae를 분리시켜 놓길 원해 그래


에스파 넥스트레벨 지젤의 랩 일부다. 나의 경우는 ‘스스로가 만들어낸 환각퀘스트, 정신과 체력 모두 소진되길 원해 그래’ 이렇게 바꿔보면 스스로 만들어낸 번아웃,,에 대해 설명이 된다. 그래서 나는 최선을 다하라는 사람들에 말에 지레 겁을 먹는 편이다. 정말 최선을 다하다간 죽을 수도 있겠다는 공포를 느꼈기 때문에.

학기 중에 휴학을 결정하고 쉼을 주기로 결심하는 데는 ‘이러다 정말 제정신이 아닐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거기에는 결정적인 하나의 사건이 있다.



졸업을 앞둔 마지막 1학기, 햇빛 쨍한 여름의 초입의 강의실에서 수업 대신에 취업 관련해서 교수님이 잔소리를 시전 하셨다. 물론 젊은 제자들이 자신의 길을 잡고 잘 나아가라는 의미에서, 격려차 도움을 주고자 각자 어떤 일을 할 것인지, 정확히는 취업 어디로 할 것이냐는 질문을 하셨다. 공무원, 공기업, 설계사무소, 시공사, 대형건설사.. 대부분 이 안에서 대답을 했다. 나도 뭘 준비하고 있지는 않고, 진로를 탐색 중이었다. 건축에 워낙 질려있어서 대충 공무원 할 것이라고 어영부영 빠르게 답변을 넘겼다.

 그리고 한 학번 위의 선배가 가구회사에 들어가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다. 교수의 반응은 냉담했다. 가구회사를 굳이 먼저 가지 말고 자신이라면 설계사무소를 가서 일을 해보고 갈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진심으로 밥벌이에 대해 고민해 주셨지만 그에 대해서 하나도 감사하지 않았다. 그게 마치 망하지 않는 무난한 길을 나에게 강요해 오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 명씩 돌아가면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심장이 너무 두근거렸다. 호흡이 가빠지고, 이러다가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1년 전에도 조별과제를 하다가 속이 답답해지면서 두근거리길래 부정맥 검사를 받아봤지만 그때도 정상이었다. 이건 정황을 보아.. 정신과를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겨우 예약을 잡은 정신과에서 부교감신경이 매우 항진되어 있어 무기력함을 느낄 수 있다는 과학적 확진을 받았다. 그제야 나는 내가 꾀병이 아니구나, 싶어서 울면서 휴학을 신청했다.

 정말이지 나는 스트레스에 취약했고, 스트레스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원래 무기력한 사람, 나는 원래 책을 못 읽는 사람, 집중 못하는 사람, 남들 3시간 할 과제를 하루 종일 하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번아웃을 겪는 사람은 과제 수행능력이 떨어지고, 스스로에 대한 효용감이 떨어지는 게 어쩌면 더 자연스러운 일인 것 같은데 오히려 자신을 몰아세우는 과정도 있었다. 그땐 내가 스트레스를 받는지 몰랐다. 불편을 속으로 삼켰기 때문에 표현할 줄을 몰랐다.



글을 쓰고, 노래를 부르고, 대화를 하면서 조금씩 아주 조금씩 나아졌다.

나아지는 과정에서 안 괜찮은 밤들도 많이 있었다. 왜 그럴지 모르겠는데 잠들기 전이 가장 번뇌하는 시간이었다. 나의 효용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다가 안방에서 주무시는 부모님 생각이 나고, 나는 가족들에게 경제적으로 도움도 안 되고 있는데 과연 내 쓸모는 무엇인가 고민하다가, 부정하다가, 긍정하려고 애쓰다가 눈물이 펑펑 쏟아지고는 했다. 그땐 왜 우는지 모르고 그냥 우는 시간들의 연속이었다. 엄마아빠가 늙어가는 게 슬퍼서, 몇 달 동안 먹고 싶다고 생각만 한 간장게장을 연말 되도록 못 먹은 게 속상해서, 과거에 노래를 부르는데 언니가 부르지 말라고 무안을 주던 게 떠올라서, 그냥 내 인생에 있었던 부정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모든 사건들을 파랗게 칠해놨다. 무엇하려 그렇게 애써야 하는 거지, 왜 살아야 하는 거지, 깊은 수렁에 빠져있기도 했다. 그렇지만 지금은 운동을 하면서, 글을 쓰면서, 남들이 들으면 굉장히 소음일 노래를 쩌렁쩌렁하게 부르면서(물론 코인노래방에서.) 살아가는 이유는 굳이 찾지 않는다. 최선을 다하는 것도 좋지만 맹목적인 최선은 사람을 닳아 없어지게 한다. 다만 스스로 도우려고 많이 노력한다. 최선을 다해 스스로를 돕는다.



하늘은 스스로를 돕는 자를 도운다, 옛날 우리 집 가훈이었고, 아빠가 제일 좋아하는 문장이다. 나는 이 말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지금은 나름의 해석을 곁들여서 스스로를 돕고자 하루하루를 사용하는데,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쉽게 말하면 스스로를 연인처럼 대하는 것(그림그리는 유튜버 이연 님). 굳이 싶은 일이지만 사랑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을 나에게 해준다. 아침밥을 먹을 때 어쩔 수 없이 햇반을 돌리게 되더라도 플라스틱 그릇 말고 도자기 그릇에 예쁘게 담아내서 먹는다던지, 물을 챙겨마시기 귀찮을 때도 있지만 지금 마시는 물이 내 몸을 덜 피로하게 할 것이라는 기대, 주변 사람들에게 좀 더 다정한 눈길로 먼저 인사한다던지(이러면 내가 더 편안한 사회생활을 할 수 있다), 궁금했던 음식을 하나씩 시도해 보기, 잠들기 전에 얼굴 마사지를 하고 시원한 팩 하나를 붙이고 누워서 라디오를 듣는다던지, 책 내용을 읽을 때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을 알 때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충분한 시간을 들여서 마침내 이해했을 때 크게 기뻐한다던지. 공부를 할 때 무한한 응원과 격려를 보내는 문장을 책 모서리에 써두고 읽는다던지 - 초등학생이 이해할 정도로 쉬운 단어로 설명할 수 있을 때 마침내 우리는 그걸 안다고 착각해도 될지도 모른다. / 공부란 늘 굴욕적인 것이다. 자신의 무식을 늘 객관화하며 나아가는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 변화하고 싶다면 실행해야 한다, 불안은 실행으로 덮는다 - 등.. 이런 작업들이 내가 알던 세상의 가치로 매겨지지 않는, 효율에 하등 도움되지 않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이런 일들은 나를 살아있게 했다.


오늘 나를 살아있게 한 일은, 스스로를 도운 일은 친구에게 감사의 편지를 적는 일이었다. 스스로 너무 진지한 사람인 걸 알고 있기 때문에 편지가 너무 무거운 분위기로 흐르지 않도록 자중하며, 그동안 곁에 있어줌에 고마움을 전하는 글을 짤막하게 써두었다. 아마 내일 친구를 만나면 전달이 될 것이다.

과거의 나였으면 끝까지 전달하길 망설일 것이다. 그가 나를 너무 진지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거리를 두면 어떡하지, 편지가 재미가 없어서 안 읽으면 어떡하지 이런 걱정들이 나를 휩쓸고 결국엔 주제가 뭔지도 모를 글 한 편만 남아 있었겠지. 지금의 나는 그렇게 생각하건 말건, 나는 제 때를 아는 사람이 되고자 한다. 타이밍이 엇갈려서 영영 전하지 못하는 편지가 얼마나 많을까 생각해 보면 좋은 걸 좋다고 말하고, 고마운 걸 고맙다고 제 때 표현할 줄 아는 것도 이어질지 끊어질지 모르는 인연에 대한 도리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한없이 가라앉을 때, 곁에 있어준 노래가 있다. 루시드 폴의 ‘오, 사랑’이라는 곡이다. 추운 날 곁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되듯이 루시드 폴의 담담한 노래, 부드러운 기타 소리를 배경음으로 깔고 어둠 속에 누워있으면 한 겹 천으로 온몸이 감싸진다고 느껴진다. 루시드 폴이라는 가수를 알쓸신잡에서 잠깐 본 기억이 있는데 그분이 과학자라서 기억에 남았다. 동경했던 옛날 꿈을 진짜 직업으로 했던 사람. 예능에서 나오는 배경음 치고 잔잔하고 고요해서 찾아 듣지 않았는데 어느새 나는 마음이 녹아내리고 몸도 흘러내릴 때, 그렇지만 조금은 생명력을 얻고 싶을 때 루시드 폴의 목소리를 듣는다. 소복이 쌓인 눈 밭에서 봄을 알리는 싹이 움트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꽝꽝 얼었던 얼음바다가 태양에 살짝 녹는 것 같다.


독후감을 많이 써보지 않아서 이게 맞나 싶은 데가 있지만, 유쾌하고 재미있는, 근데 또 위로도 되는 편지 모음집을 추천하고 싶은 마음에 글을 급히 끄적여보았다. 내가 가진 말하기, 쓰기 습관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는 시간이었다. 유창하게, 물 흐르듯이 읽히는 글을 쓰고 싶다.


긴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웃님들. 최선을 다하지 말고 편안해지길 바랍니다.

작가의 이전글 브런치에서 글쓰기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