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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오십 Oct 19. 2023

회복의 날.

언제나 네가 어디에 있든, 하현상

몸이 바람 빠진 타이어처럼 푹 꺼지는 날이 있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계절이 바뀔 때마다 종종 겪는 일이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겨우 내 장을 본 과일과 채소를 냉장고에 채워두고 곧장 바닥에 쓰러지듯 눕는다.

초저녁인 지금, 곧장 씻어야 몸이 편하다는 생각을 하지만 몸은 바닥에 꽉 눌어붙어서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다. 전날 밤 잠을 부족하게 잔 것도 아니지만 뜨끈한 보일러가 한바탕 도는 바닥 위에 늘어진 이상 눈이 꿈뻑꿈뻑하더니 스르륵 기분 좋은 잠에 든다. 갑자기 진동소리가 들려서 눈을 뜨니 전화가 끊어졌다. 첫 번째 전화를 무시하고 잠에 들었지만 다시 한번, 두 번째 전화가 왔을 때 이미 바깥은 꽤 어둑해져 있었다. 책상 위로 비척거리는 손을 뻗어 전화를 받았다. 비몽사몽 하지만 확실히 조금 충전이 되었다.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서 얼굴의 때를 닦아낸다. 또 방전되기 전에 빠르게, 하지만 최소한으로 행동하는 나의 모습을 보면 유난히 방전이 빨리 일어나는 스마트폰 같다. 애초에 저전력모드로 생활하고 있는데 추위 때문인가. 아까도 자전거를 타고 장을 보러 다녀오는 길에서 찬바람에 맑은 콧물이 눈물처럼 주르륵 쏟아졌다. 오열하는 사람처럼 시도 때도 없이 훌쩍거렸다. 코흘리개도 추가다. 코흘리개에 방전이 빨리 되는 최신형 인간 어떤데.



소위 생각만 한 날이었다. 취업할 생각, 공부할 생각, 과제할 생각, 그리고 운동할 생각.

밥도 겨우 챙겼다. 불닭볶음면과 닭가슴살 핫바. 잘 차려먹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이런 식단은 정말 드문 일이었다.

여행용 치약칫솔, 기사시험 책, a4용지, 필통, 물병, 마사지볼 등이 든 4kg가량의 배낭을 메고 20분 거리의 도서관에 가는 건 일주일에 5일을 하는 일인데, 오늘따라 가기가 싫었다. 시험기간이라 사람들이 바글대고, 앉을자리를 겨우 찾아 앉아도 공부할 에너지가 없으리라 확신했다. 한낮에도 나는 완전히 피로했다.

왜인지 모르겠다. 근데 이따금씩 기운을 내려고 아무리 애써도 축 가라앉는 날이 있다. 이럴 때면 오늘 하루는 완전히 K.O. 당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막 우울한 건 아니었다. 지쳐서 늘어지는 것에 가까웠다.

대처에 앞서서 우울함이 더 큰 건지, 피로에 가까운 것인지를 확인하는 건 중요한 절차다.

난 참 피곤한 사람이다. 도서관에 앉아서 공부를 해도 어느 정도 이상의 집중력으로 어느 정도 이상의 공부시간을 가져야 만족을 하고, 밥을 먹을 때도 신선한 야채나 과일이 꼭 있고 예쁜 접시에 담아 먹어야 만족한다. 주변환경이 난잡하고 정돈되어 있지 않아서 불쾌를 느끼면 스스로에게 화가 난다. 이러하다 보니 생활에 있어서는 부지런한 편이다.

그렇기 때문에 평소에 아무렇지 않게 들던 가방이 더 무겁게 느껴지고 일상이던 방청소, 씻기, 설거지하기, 빨래하기, 밥 챙겨 먹기 등 나를 돌보는 일이 더뎌지는 때면 내가 지쳐있구나 싶다.

아. 확실한 신체화 반응도 있다. 입 안에 수족구가 생겼다. 윗입술 아래, 앞 니 위에 자리해 있어서 꽤 아프다.

지쳐있는 사람을 몰아세워 무엇하나. 닦달해야 무엇하나. 잘 쉬고 빨리 낫길 바란다고 할 수밖에. 스스로에게 각박할 이유는 없다.



영양가 있는 과일을 잔뜩 샀다. 비타민 c가 잔뜩 있는 귤, 먹고 싶었던 계절과일 무화과를 먹고 잠시 산책을 다녀왔다. 잠이 오면 쓱 잠들었다.

필요한 게 뭔지 알고 챙기는 스스로가 뿌듯하다. 아픈 날도 있는 거지, 조급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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