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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뚜오뚜오 May 25. 2017

숨결이 바람 될 때

폴 칼라니티의 에세이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의사 폴의 에세이를 읽으면서 든 생각은 세상에 준비된 이별이란 존재하는가에 대한 생각이었다.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기도 힘든 와중에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이별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너무 힘들면 나도 자포자기하듯 담담히 받아들이게 될까. 또 만약 그렇다면 담담한 이별을 성숙한 이별이라고 칭할 수 있을까.


사실 나는 폴의 입장이어도, 가족의 입장이어도 저들만큼 성숙하게 예기된 이별을 대처해나갈 자신이 없다.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느낌과 절망감을 숨기지도 못해서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할 것이 뻔하며, 의사가 아니기 때문에 저만치 객관적으로 스스로의 상태를 판단하지도 못할 것이다. 이런 나의 미성숙한 대처는 모습을 그저 나를 바라보고 있어야 하는 사람들의 작은 희망의 불씨마저 빨리 꺼지게 할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 있어서 병에 대한 폴의 태도는 가족들에게 조금 다른 형태의 믿음을 실어줬다고 생각한다. 가족은 병이 낫기를 바라는 희망보다는 폴이 가진 병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더라도 끝까지 폴은 성숙하게 대처할 것이며 후회 없는 결정을 하겠노라는 믿음이 더 컸을 것이다. 보이지 않는 그들 간의 끈끈한 결속과 믿음이 가족들로 하여금 굳건하게 끝까지 폴의 곁을 지킬 수 있도록 지지했을 것이다.


사실 처음에는 폴 부부가 아이를 가진 것에 대해서 굉장히 부정적으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다시 생각해보니 그저 부인인 루시는 아빠로서의 폴에 대한 믿음과 사랑에 확신이 있었던 것 같다. 폴은 언제 딸의 곁을 떠나더라도, 설사 그 이별이 조금 이르게 느껴질지라도 딸에게는 자랑스러운 아빠로, 루시에게는 둘도 없는 사랑으로 기억될 것이라는 확신 말이다. 


정신보단 몸이 힘든 것이 낫다고들 하지만 사실 몸이 힘들 때 정신도 한없이 피폐해졌던 경험이 있다. 어쩌면 몸의 병이나 마음의 병은 온전히 스스로 겪어내야만 하는 일이고, 그래서인지 마음이나 몸이 아플 때는 별게 다 서러워진다. 환자의 보호자도 마찬가지다. 아픈 사람은 보고만 있어도 힘이 빠진다.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다. 같은 아픔을 느끼지는 못하겠지만 어쩌면 마음은 그저 바라만 봐야 하는 쪽이 더 아프다. 


 그런 점에 있어서 폴의 의사로서의 사명감과 그것을 온전히 응원해주는 가족들의 모습은 경이로웠다. 그래서 폴의 상황이 안타까운 가운데 한 편으로는 부럽기도 했다. 태어나 어떤 것에 그만치 큰 열정을 가지고 있다는 점. 또 그것에 아낌없는 응원을 보내는 절대적인 내 편, 나의 가족이 있다는 점. 긴 인생은 아니었지만 그의 인생은 충분히 행복했고, 충분히 아름다웠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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