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글쓰기의 모순

by 두올

나에게도 언젠가는 글쓰기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날이 오면 좋겠다. 하지만 모순적이게도 정말 그렇게 되면 어떡하나 하는 오만한 두려움도 있다. 남들이 들으면 '책이라도 한 권 쓰고 그런 말을 하시지?' 라며 비웃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름의 이유가 있다. 좋아하는 취미가 업(業)이 되는 순간, 즐거움에 녹이 스는 경험을 여러 차례 했기 때문이다.


나는 한 때 영어를 좋아했다. 프렌즈 시즌 10개(총 236회)를 질릴 때까지 봐서 어느 순간 귀가 트일 만큼 좋아했다. 그래서 영어를 가르치는 일을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영어 학원에서 중학생을 가르치는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다. 그런데 웬걸, 영어가 일의 일부가 되자마자 미드에서 느끼던 재미가 증발해 버리는 것이 아닌가. 원래는 아무 생각 없이 깔깔 웃으면서 미드를 봤었는데, 영어 선생님이 되자 문장 하나하나를 볼 때마다 ‘이건 어떻게 가르쳐야 하지?’ 하는 고민이 머릿속을 침투했다. 달을 그저 바라보기만 하면 아름답지만, 달을 탐사하려는 목표가 생기면 그 목표에 눈이 멀어 달의 아름다움은 더 이상 보지 못하는 아이러니라고나 할까.


몇 년 간 글을 쓰고 싶었지만 망설였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내 삶의 가장 큰 즐거움인 글을 읽는 행위가 노동이 되어버릴까 봐. 그런데 글을 쓰지 않고는 못 배기는 순간이 와 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글을 쓰면서 원칙을 세웠다. 가능한 한 ‘내킬 때만’ 글을 쓸 것. 잘 써야 한다는 생각도 하지 말고, 다른 사람들이 주는 피드백에도 지나친 의미 부여는 하지 말 것. “내 글은 왜 이렇게 못났지?”라며 자괴감에 빠져 재미를 잃을까 봐 두려워서다. 나의 자존감이 그 정도로 단단하지는 않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


글쓰기에는 다른 모순도 있다. 바로 ‘멋’이다. 내가 글을 읽고 쓰는 동기 중 하나는 그 행위 자체가 '멋있어서'다. 글을 읽고 쓸 때, 그리고 그게 취미라고 사람들에게 소개할 때 왠지 모르게 우쭐해져 글을 자꾸 쓰게 된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글 속에서도 ‘멋진 나’만 전시하고 싶어진다는 문제다. 아쉽게도 내가 지금까지 관찰한 바로 잘난 체하는 글을 좋아하는 독자는 없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던 에세이 작품 중 하나가 하완의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이다. 그 책은 출간 즉시 수많은 청년들의 공감을 사며 베스트셀러에 등극했는데, 내가 보기에 그의 비결은 수비드 닭가슴살처럼 허세의 기름기를 쫙 뺀 문장에 있었다. 며칠 전에 나온 신작에서도 그는 거침이 없었다. 똑바로 섰을 때 그의 소중이(?)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뱃살이 늘어나 어쩔 수 없이 러닝을 시작했다거나, 경제적 위기에 봉착하여 처가에 얹혀살게 되었다는 따위의 이야기들. 그는 혹시라도 자신을 부러워하는 사람이 있다면 전혀 그럴 필요가 없다는 친절한 설명까지 덧붙인다. 나는 솔직히 그렇게까지 솔직할 자신은 없는데. 에세이 분야에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려면 그 정도 투명함은 겸비해야 하는 것일까. 멋진 사람이 되고 싶어서 글을 쓰고 싶은 건데 독자는 작가의 멋 없는 모습을 기대하니 이 또한 내가 봉착한 글쓰기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문체'를 정하는 일도 나에겐 어렵게 느껴진다. 다른 작가들은 여러 책에 걸쳐서 처음부터 끝까지 고유한 분위기와 결을 유지하는 듯하다. 은유 작가의 글에서는 온화하면서도 윤리적인 성품이 느껴지고, 박우란 작가의 글에서는 지적이면서 정직한 태도가 느껴지고, 하완 작가의 글은 시니컬하면서도 재치가 있다. 읽기만 할 때는 몰랐다. 특정 문체를 갖는다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일인지. 나도 나의 문체를 정하고 싶은데, 막상 그러려니 갑갑함이 밀려왔다. 수많은 내 모습 중 하나를 골라, 앞으로 그 모습만 사람들에게 보여주겠다고 맹세하는 기분이랄까.


INFJ는 16개 MBTI 유형 중 가장 많은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유형이라고 한다. 내가 INFJ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나는 어떤 글에서는 유쾌하고 긍정적인 사람이 되었다가, 다른 글에서는 우울한 사람이 된다. 가장 당혹스러운 점은 어떤 모습이 진짜 내 모습인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이 상태에서 어떻게 필체를 정하란 말인가? 나는 여전히 필체라는 주제 앞에서 방황 중이다.


가장 큰 모순은—이렇게 어렵다고 불평하면서도 1년 넘게 어떻게든 글쓰기를 지속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책 속의 문장들은 관성을 따라 뚜벅뚜벅 앞만 보고 걸어가는 나를 붙들어 세우고 물어보곤 했다. '너는 누구인가.' ‘삶은 어때야 하는가’. 그런 질문 앞에서 서성거릴 때면, 밖과 타인을 향하던 시선을 내면으로 틀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이후 마주치는 인생의 갈림길에서 조금 더 나다운 선택을 하게 되는 것이다. 엄마나 남편, 친구를 탓하지 않을 선택들, 스스로를 기만하지 않는 정직한 선택들을.


나는 글이 사람들의 마음에 일으키는 거대한 파동에 동참하고 싶은 것이다. 글을 쓰겠다는 결심은, 억지로 외투를 벗기려는 세찬 바람이 아니라, 햇살처럼 다가가 스스로 외투를 벗게 만드는 힘을 믿겠다는 다짐이다. 글쓰기가 때로는 모순되고 어려울지라도, 나는 오래도록 글을 좋아하는 사람, 그리고 글을 쓰는 사람으로 남고 싶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