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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한 무지, 그 압도적 해로움에 대하여

by 두올

대통령 선거 후보자 토론회에서 이준석의 자의식이 점점 비대해지는가 싶더니 결국 팝콘처럼 터져버렸다. 그는 차마 입에 올리지 못할 더러운 말을 국민들의 안방에 배설하고 말았는데, 며칠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아무런 문제를 느끼지 못하는 듯하다. 그의 말이 왜 기분 나빴는지를 설명해보라는 말은, 성희롱이나 성폭력을 당한 여성에게 구체적으로 어떤 점이 기분 나빴는지 말해보라는 요구처럼 당혹스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하지 않는다면, 이 분노를 언어화하지 않는다면, 무지하게 폭력을 행하는 사람이 당하는 고통을 대략적으로나마 가늠할 방도가 전혀 없다(실제로 내 주변의 남성들이 그저 남의 말을 인용만 했을 뿐인데 어떤 점이 기분이 나쁘냐고 나에게 ‘정말로 몰라서’ 질문했다).


이준석이 ‘인용’했다는 그 말에는, 여성의 성을 희화화하고 함부로 대상화하며, 남성으로서 우위를 점하여 여성의 신체를 마음대로 훼손하고자 하는 저열한 욕망이 그대로 배어 있다. 의도와 상관 없이, 그 원색적인 말을 듣는 사람은 그 말이 품고 있는 폭력성을 고스란히 온 몸으로 느껴야 한다.


성희롱이란 상대의 의사와 무관하게 불쾌감, 모욕감, 굴욕감을 주는 모든 행위를 뜻한다. 그런 측면에서 이준석은 다른 장소도 아닌 대선 후보 토론장에서, 온 국민을 향해 성희롱을 저질렀다고 할 수 있다. 그저 ‘인용’했을 뿐이라고? 이준석의 그 말을, 그저 '인용'이라는 미명하에, 직장에서, 가족이나 친구들과의 일상 대화 중에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입에 올릴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사람들이 그 말을 차마 입에 올리지 못하는 이유는, 본능적으로 그것이 상대를 향한 명백한 모욕임을 알기 때문이다.


이준석이 ‘성희롱’, ‘음담패설’이라는 단어를 두고 굳이 원색적인 여성혐오 발언을 입에 올린 이유는, 오직 그 강렬한 발언을 발판 삼아 화제의 중심에 서고자 했던 욕망 때문인 것으로 보이는데, 그 발언을 마치 여성을 위하는 척 내뱉었다는 점이 무척 가증스러웠다.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 자의식을 남들도 인정해주길 바라는 집착에 그는 눈이 완전히 멀어버린 것일까? 그는 그 말이 여성들에게 얼마나 커다란 충격과 모욕감을 안겼는지 가닥조차 잡지 못하는 듯하다. 밑천을 드러낸 그의 정서적 결핍과 무감각한 태도에 나는 깊은 좌절을 느낀다. ‘저는 그저 인용을 했을 뿐입니다’라고 미소 지으며 '심심한 사과‘를 전하는 ‘젊은 대선 후보’의 모습에서 지하로 침잠하는 것 같은 암담함을 느낀다.


스스로 모른다는 것조차 모르는 순수한 무지는 때때로 악에 가깝다.


말에는 힘이 있다. 아름다운 말은 사람을 감응하게 하고 누군가의 삶을 바꾸기도 하지만, 더러운 말은 폭력을 확산시킨다. 이준석의 말을 ‘순수하게’ 학습한 어떤 남자 아이들은 학교에서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그 언어폭력을 재생산하여, 당황하는 여자 아이들의 표정을 보며 자신에게 남을 좌지우지할 힘이 생겼다며 흥분할지 모른다.


대통령이 되고 싶다는 사람이 자신을 홍보하는 자리에서 국민 전체 여성을 대상으로 성희롱을 하고서도 허리를 꼿꼿히 세우고 있을 수 있는 데에는 우리가 목소리를 내지 않은 책임이 크다. 강력범죄 피해자의 88%가 여성이고, 국민의 절반이 여성임에도 여성가족부를 폐지하겠다는 공약이 나올 수 있는 이유는, 여성이 사회에 영향을 주는 주체가 되기보다는 스스로 영향을 ‘받는’ 위치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아무도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법이다.

목소리를 냈으면 좋겠다. 더 이상 침묵하지 않고, 서로를 향해 연대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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