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전 악몽이 또 나를 찾아왔다.
오래된 폐가처럼 보이는 고아원 주변으로 딸기 덤불이 무성하게 자라 있다. 나와 엄마, 아빠는 각자 바구니를 들고 딸기를 따고 있었다. 그런데 딸기를 따던 와중 덤불 사이에 하얀 햄스터 두 마리가 내 눈에 들어왔다. 나는 햄스터들을 바구니에 조심스럽게 담았다. 잠시 후 엄마가 딸기를 씻겠다며 바구니를 물 항아리에 담그려 했다. 나는 급히 말렸다. 내 바구니에는 햄스터가 있으니 물에 넣지 말라고. 하지만 엄마는 내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했고, 아빠는 괜찮다면서 내 바구니를 물 속 깊이 담가버렸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뒤늦게 바구니를 꺼내서 딸기를 땅에 쏟고 햄스터를 찾았을 때, 큰 햄스터는 죽어 있었고 작은 햄스터만 겨우 숨을 쉬고 있었다. 나는 울면서 잠에서 깼다.
얼마 전 엄마, 아빠가 우리 신혼집에 처음 놀러 왔을 때다. 그날따라 여름 공기가 쾌청해서 우리는 밖으로 나가 공원에 있는 나무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그 무렵 나는 채권 투자에 관심이 있었고, 경제에 밝은 아빠에게 이것저것 물었다. 아빠는 채권 가격과 금리와 수익률의 관계에 대해 그래프까지 그려가며 열정적으로 설명했다. 엄마도 읽고 있는 경제 책에서 배운 것들에 대해 주섬주섬 말을 꺼냈다.
그러자 아빠가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
"당신은 좀, 모르면 가만히 있어라."
익숙한 말이었다. 나도 어릴 적부터 지겹게 듣던 말. 엄마는 정말로 입을 다물었고, 그날도 내 마음속 작은 유리조각 하나가 깨졌다. 존재를 눌러버리는 선언이었다.
성인이 된 후로 나는 누군가 나를 무시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면, 상대가 더 무식하다고 명명백백히 밝혀줘야 성에 찼다.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또 나를 무시하는 사람은 없는지 눈을 크게 뜨고 살폈다.
그런데 남편과 함께 서점을 갔을 때다.
"외국 시를 엮은 시집은 많은데, 우리나라의 다양한 시를 한 권으로 엮은 시집은 별로 없어서 아쉬워."
내가 말했다.
"여기 윤동주 시집 있는데?"
"아니. 한 명의 시만 있는 시집이 아니라 여러 시인의 작품을 한 데 엮어둔 시집 말이야."
남편이 그 말을 듣고 갑자기 풀이 죽었다. 왜 그러느냐고 했더니, 내 눈이 서늘하게 ‘왜 말귀를 못 알아들어?'라고 말하고 있었다고 한다. 나는 흠칫했다. 내 솔직한 마음을 들켜서도 있지만, 그보다는 나의 모습이 아빠를 닮아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아빠 같은 사람을 만나면 똑같은 방식으로 눌러줘야지 했는데 정말로 나는 아빠의 거울이 되어 있었다.
나는 엄마, 아빠를 원망하지 않는다. 부모도 사람이기에 완벽할 수 없다고, 오히려 그들이 나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진심으로 믿는다. 그런데 나의 무의식은 괜찮지 않았던 건지, 어릴 때 꾹꾹 눌러놨던 분노는 참다가 참다가 아무 데서나 터져버리는 아이의 울음처럼 예측이 불가능했다. 애도되지 않은 감정은 반드시 돌아온다는 라캉의 말은 진짜였던 걸까?
한번 더 그 악몽이 나를 찾아왔을 때, 나는 꿈을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햄스터를 죽게 한 물항아리는 아빠의 '말'이다. 죽어버린 큰 햄스터는 어린 내가 내뱉고 표현하고 싶었으나 끝내 발화하지 못하고 죽어버린 나의 ‘말’이다. 아빠가 햄스터를 물 안에 넣는 것을 지켜보던 엄마의 모습은 아빠의 폭력에 왜 침묵했냐고 원망하는 나의 마음이 투영된 이미지다. 살아남은 작은 햄스터는, 작고 나약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어린 시절의 나이다.
어린 분노는 여전히 살아 꿈틀거리며 꿈을 통해 자기를 알아달라고,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마 내가 글을 쓰는 이유 중 하나도 그것 때문일 것이다. 수필 수업 선생님의 말처럼, 글에는 마음을 치유하는 힘이 있으니까.
날것의 아픔을 글로 옮기는 일은 언제나 약간의 수치를 견디는 일이다. 그럼에도 내가 이 수치를 견디는 건, 상처를 명분으로 또 다른 상처를 남기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도 글을 쓰며, 물속에 오랫동안 잠겨있던 나의 말들를 하나씩 건져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