뾰족하고 강렬하게 스치는 맛이 아니라 서서히 풍부하게 입 안 가득 퍼지는 맛, 물김치의 상큼한 풍미가 고기 육수에 더해져 오묘하지만 계속해서 입에 머금고 있고 싶은 맛, 삼켜 버리면 금세 아쉬워져 곧바로 한 숟갈 다시 떠먹어야 하는 맛이었다.
나는 요즘 평양냉면에 푹 빠져 산다. 며칠 전에는 평양냉면이 맛있다고 소문난 식당에 가려고 남편과 함께 연차까지 낸 일이 있다. 38도에 달하는 열기에 선풍기 바람마저 뜨겁게 느껴지는 눅진한 여름날이었다.
우리는 오후 2시 30분에 식당에 도착했다. 비교적 한산할 거라는 전략적 판단에서 선택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식당 앞은 이미 대기하는 사람들과 차로 붐비고 있었다. 스무 명이 넘는 사람들이 식당에서 마련한 천막 아래, 파란 야외용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끓는 듯한 공기를 마시고 있었다. 그들은 이글거리는 눈으로 순번을 알려주는 스크린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30분 정도는 기다려야 하려나 걱정하며 테이블링 순번표 발급기 앞으로 갔다.
대기 90팀.
우리 앞에 무려 90팀이 있었다.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주말도 아니고, 금요일도 아니고 목요일인데. 점심시간도 아니고, 저녁 시간도 아니고 오후 2시 30분인데. 이미 점심 먹기에도 늦은 시간인데. 이걸 포기해, 말아. 음식 때문에 내가 이렇게 길게 기다린 적이 있었던가? 아니, 짧게라도 기다려보긴 했었나?
일생일대의 결단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기다릴 것인가, 말 것인가.
나는 열심히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목요일 오후 2시 30분에 대기가 90팀이면 주말에는 대기가 몇 팀일까. 아니, 오늘 포기한다면 나는 과연 다시 여기 올 용기를 낼 수나 있을까. 연차까지 냈는데 이 맛을 못 보고 돌아가면 나중에 후회하지는 않을까.
나는 비장한 마음으로 결단을 내렸다.
기다린다.
대신 카페에서.
우리는 대기 순번을 걸어두고 근처 카페로 향했다. 나는 책을 읽고, 남편은 그림을 그리지만 좀체 집중이 되지 않는다. 한 시간이 지나고, 두 시간이 지났다. 그동안 대기 순서를 확인하려 핸드폰을 50번은 족히 들여다보았다. 점점 화가 일기 시작했다.
얼마나 잘난 집이길래 사람을 두 시간씩이나 기다리게 해?
대기가 이렇게나 많은데 현장 대기 접수만 받는다는 게 말이 돼?
열 팀이 남았을 때 우리는 흐느적흐느적 식당 앞으로 향했다. 뜨겁게 달궈진 야외용 의자에 앉아 입을 꾹 다물었다. 나는 기다림을 후회하고 있었다. 두 시간을 기다릴 정도로 맛있는 음식이라는 게 존재할 리 없었다. 연차라는 황금 같은 시간을 왜 기다림에 쓰자고 했을까, 나 스스로에게 화가 났다. 아직도 더 기다려야 해? 시원한 카페에서 더위를 충분히 식히고 왔지만 10분이 지나자 아스팔트의 강렬한 열기에 분노까지 더해져 내 정수리에서는 연기가 날 지경이었다.
385번!
20분이 지나자 스크린에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리던 번호가 떴다. 그러나 설렘과 허기는 너무 오래되어 사라진 지 오래였다. 우리는 에어컨 바람이 잘 닿지 않는 어두운 구석 자리로 안내받았다. 나는 가라앉은 기분으로 평양냉면 두 그릇과 한우 불고기를 주문했다. 그리고 속으로 속삭였다. 맛없기만 해 봐.
냉면은 빠르게 준비되어 나왔다.
하얗고 묵직한 도자기 그릇에 고동 빛깔의 투명한 국물과 메밀이 쩜쩜이 박힌 면이 담겨 있고, 면 위에는 물김치와 배 고명이 정갈하게 올려져 있었다.
나는 엄중하게 마음을 가다듬고, 심호흡을 한 번 크게 했다. 그리고 국물부터 한숟갈 떴다. 평양냉면의 진가는 국물에 있으니까.
…!
육수는 맑고 시원했다. 뾰족하고 강렬하게 스치는 맛이 아니라 서서히 풍부하게 입 안 가득 퍼지는 맛, 물김치의 상큼한 풍미가 고기 육수에 더해져 오묘하지만 계속해서 입에 머금고 있고 싶은 맛, 삼켜 버리면 금세 아쉬워져 곧바로 한 숟갈 다시 떠먹어야 하는 맛이었다. 얼음처럼 쨍하게, 화들짝 놀라게 하는 찬기가 아니라 열기를 서서히 식혀주는 은은한 찬기가 국물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다.
메밀면은 윤기가 흐르고 쫄깃해서 입 안에서 끊을 때마다 탱글, 소리를 내며 끊기는 것 같았다. 사각거리며 씹히는 배 고명은 달고 시원하게 감칠맛을 더했고, 뒤이어 따라오는 물김치 고명이 짭짜름하게 끝을 장식했다.
육수, 메밀면, 배, 물김치가 번갈아가며 혼을 빼놓아 젓가락은 다음으로 뭘 집어야 할지 갈피를 못잡고 버둥거렸다. 분노로 들끓던 나의 편도체가, 혀에 닿은 황홀한 맛에 순간 어리둥절해지는 게 느껴졌다.
아, 이 맛이로구나. 내가 이걸 맛보려고 두 시간을 기다렸구나.
남편은 쉬지 않고 국물을 입에 떠 넣으며 말했다.
맛있으니까 당황스럽네.
우리는 웃음을 터뜨렸다.
두 시간이나 손님을 기다리게 만든 오만방자한 평양냉면은 두 시간 동안 기다릴 가치가 있는 음식으로 그 지위가 승격되었다. 왜 그렇게까지 화를 냈을까? 고개를 갸우뚱거리다 나는 그만 민망해져 버렸다.
다시 생각해 보면, 나이 서른에 두 시간이나 기다릴 정도로 먹고 싶을 정도의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음식을 만난다는 것은 행운이다. 그저 허기를 채우고 끼니를 때울 목적으로, 의무적으로 배를 채운 지가 얼마나 오래되었나. 음식을 먹은 게 아니라, 감상한 게 언제였나.
살다 보면 하루를 그저 ‘채워야 하는 것들’로 채우기 마련이지만, 가끔은 마음이 끌리는 무언가에 하루를 걸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기다림 끝에 맛본 그날의 냉면처럼 예상치 못한 즐거움이 찾아올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다음에 또 그런 충동이 생긴다면 다시 기다려봐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화는 조금 덜 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