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사람은 머문 자리도 아름답습니다.’
이 글을 처음 접한 장소는 화장실이었다. 아마 일곱 살, 여덟 살 즈음이었던 것 같다. 처음엔 뜻이 와닿지 않았다. 아름다운 자리가 뭐지? 주어는 두 개인데, 서술어는 하나인 것도 어색했다. 나는 그 문장을 수십 번 더 읽고 나서야 화장실을 깨끗하게 쓰라는 뜻이구나 하고 이해했다.
하지만 이 말의 진짜 의미는 몇 달 전 외할머니 병문안을 한 후에야 알게 되었다.
외할머니는 몇 달 전부터 치매끼가 심해져 요양원에서 요양병원으로 자리를 옮기셨다. 엄마는 간호사인 이모의 말을 전했다. 치매 환자는 처음에는 혼자 걷기 어려워지고, 그다음에는 시간을 읽을 줄 모르고, 그다음에는 어제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고, 마지막에는 가족들의 얼굴을 잊게 된다고. 엄마는 이제 내가 할머니를 찾아뵐 때가 됐다고 말했다.
외할머니는 맞벌이라 바쁜 우리 부모님을 대신해서 나와 동생을 몇 년간 돌봐주셨었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다른 서너 명 사촌들을 위해 수년간의 베이비시터 봉사를 하셨고, 임무가 모두 끝나자 안동의 작은 아파트에서 홀로 지내셨다. 그러는 동안 나는 중학생이 되었고, 고등학생이 되었고, 어른이 되었고, 결혼을 했다. 나는 그동안 멀어서, 공부하기 바빠서, 대전에 있어서, 서울에 있어서, 직장이 바빠서 할머니를 뵈러 가지 않았다. 이후로는 죄스러워 갈 수가 없었다. 그렇게 10년이 넘게 흘렀다.
오랜만에 본 할머니는 살이 많이 쪄 있었다. 그리고 고약한 냄새가 났다. 할머니의 환자복 가슴팍과 소매에는 음식물이 묻어 있었다. 엄마는 간호사 선생님을 불러 환자복을 바꿔달라고 했고, 나는 할머니께 여기서 생활하시는 건 어떠냐고 물어봤다. 하지만 할머니는 그 질문을 이해하지 못했다. 대신 아기처럼 웃으며 ‘와줘서 고맙데이’라고 했다.
할머니가 생선을 좋아하신다길래 나는 병원에서 차로 오 분 거리에 있는 코다리찜 식당을 찾았고, 거기로 점심을 먹으러 가자고 했다. 그런데 할머니와 같은 병실을 쓰는 할머니 두 분이 마주 앉아서 귤을 까먹다 말고 나에게 말했다.
‘저번에도 난리 났소. 밖에서 밥 먹고 와서는 옷이랑 다 베리고…’
알고 보니 우리가 방문하기 며칠 전 작은 할머니(할머니의 여동생)가 자식들을 데리고 와서 할머니와 함께 외출을 했는데 할머니가 그만 차에 실수를 했다고 한다. 기저귀를 안 찬 채로 음식을 너무 많이 드신 것이다.
내가 아는 할머니는 남에게 폐를 끼치는 걸 지독히도 싫어하는 분이다. 거동이 불편하니 주변 사람들이 고생한다고 몇 년 전 사촌언니 결혼식에도, 작년 내 결혼식에도 오지 않으셨다. 엄마와 이모들이 할머니를 찾을 때마다 괜찮다고, 오지 말라고 손사래를 치셨다. 내가 이번에 가겠다고 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고 했다.
그런 할머니가 당신의 괄약근을 조절하지 못해 남의 차와 병원 옷이 엉망이 된 것이다. 이 요양병원은 아주 작은 곳이다. 같이 생활하는 할머니, 간호사, 급식 보조원 모두가 봤을 것이다. 나는 말문이 막혔다. 간호사는 왜 굳이 밖에 나가서 먹느냐고, 그냥 음식 포장해 와서 병실에서 먹으면 되지 않느냐고 했다. 할머니는 그 말이 오가는 동안 아무 말도 않은 채 화장실로 느릿느릿 걸어가서 몇 분이 지나도록 거기 계셨다. 할머니가 화장실에서 나오자 엄마는 할머니에게 볼일을 봤냐고 물어봤고, 할머니는 고개를 저었다. 혹시 몰라서 화장실을 미리 가신 거였다.
‘기저귀는 찼어요?’ 엄마가 말했다.
할머니는 ‘으응’하고 말했다.
엄마는 다른 할머니들이 질투가 나서 그런 거라고 했다. 외할머니한테는 계속 손님이 찾아오니까. 누가 병문안 왔을 때라도 바깥공기를 쐐야지 계속 병원에 있으면 어쩌냐고 그랬다.
우리는 병원 사람들의 걱정을 뒤로하고 코다리찜 식당에 도착했다. 엄마는 할머니 거동이 힘들어져 더는 살이 찌면 안 된다는 말을 반복하면서도 자꾸만 할머니 숟가락에 코다리 생선살을 올리고, 더 드시라고, 더 드시라고 했다.
남편은 대뜸 할머니에게 내가 어렸을 때 어떤 아이였냐고 물었다. 할머니가 그날 유일하게 이해한 고난도 질문이었다. 할머니는 내가 어렸을 때 친구들을 집에 많이 데리고 왔다고 했다. 할머니는 나와 내 동생 밥까지 딱 삼인분만 해 놓고 우리가 하교하기를 기다렸는데, 내가 매번 말도 없이 친구들을 우르르 데려와 선심을 쓰는 바람에 할머니는 밥을 여러 번 굶었다며, 그래도 친구를 데려오지 말라고 할 수는 없지 않냐고 남편에게 물었다. 우리는 그 말에 모두 웃었다. 기억하지 못할 만큼 오래된 일에 대해 나는 그제야 죄송스럽다고 했다. 너무 늦은 사과였지만.
다행히 할머니를 자주 찾는 이들은 많은 것 같았다. 엄마와 이모는 매주 돌아가면서 할머니를 목욕시키러 가고 있었고, 외할머니의 큰 며느리인 외숙모는 매주 외할머니가 좋아하는 반찬을 여러 첩 싸서 찾아간다고 했다. 엄마는 딸도 그렇게는 못한다고 혀를 둘둘 찼다. 다음 주에는 사촌오빠네 가족이 할머니를 보러 온다고 했고, 설에는 언니와 조카들이 케이크를 만들어 갈 예정이라고 했다. 아무래도 할머니가 살을 빼시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할머니를 찾는 누군가가 매주 있는 이유는 무얼까. 할머니는 부자가 아니다. 다섯 명의 다른 할머니들과 병실을 함께 쓰고 계셨고, 병실에는 낡은 외투 두 벌밖에 없다. 할머니와는 대화다운 대화도 할 수 없다.
점심을 먹고 요양병원으로 돌아갔는데 할머니가 일층 휴게실에 있는 자판기 믹스 커피를 드시고 싶다고 했다. 나는 삼백 원짜리 밀크 커피를 뽑아드렸다. 할머니는 또 환하게 웃으며 ‘고맙데이’라고 했다. 어리고 철없던 나를 돌봐주신 할머니가 이렇게 될 때까지 나는 얼굴 한번 들이밀지 않아서 죄송스러워 죽겠는데 할머니는 자꾸 고맙다고만 하니 눈물이 났다.
사람들이 계속 찾아오는 이유는 할머니가 아름다워서고, 할머니의 머문 자리가 아름다워서였다. 사람들은 그 자리가 그리워 할머니를 계속 찾아오나 보다. 어떤 사람이 이 짧은 생을 잘 살다가 간다고 할 수 있나. 나는 할머니 같은 노인이 되고 싶다고, 할머니처럼 살다 가고 싶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