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달 볶여도, 끝내 우려내지더라도
남해바다를 수놓은 은빛 멸치_삼양수산
볶음 멸치 VS 국물 멸치
당신의 선택은?
취향에는 옳고 그름이 없다지만, 때론 확고한 취향은 수고로움을 불러내요. 멸치 생산지 방문을 앞두고, 한 동료가 수줍게 고백했어요. 가족 안에서도 멸치 취향이 저마다 달라 볶음 멸치 한 번 먹으려면 무려 3번이나 볶아야 한다고요. 빨간 고추장양념을 묻힌 굵은 멸치만 찾는 아빠, 설탕에 바삭하게 볶은 적당한 크기의 볶음 멸치를 선호하는 아들내미, 부드럽게 볶아낸 잔멸치만 먹는 딸내미까지, 듣기만 해도 요리하는 사람의 수고가 느껴지더군요. 가족 안에서도 취향이 갈릴 정도로, 멸치는 크기에 따라 맛도 식감도 조금씩 다르죠. 반찬으로, 육수로 자주 접하는 멸치가 우리 식탁에 오르기까지 어떤 이야기를 품고 있을지 기대하며 경남 남해로 향했어요.
정작 남해에서 자란 사람은 몰랐던 멸치쌈밥
호수처럼 잔잔한 바다 사이사이에 섬이 오밀조밀 떠 있는 남해. 바라보기만 해도 마음이 차분해지고 여유가 스며드는 풍경이에요. 도시 생활에 빨라진 발걸음마저도 느려지게 하는 남해는 서울에서는 넉넉잡고 5시간 정도 가야 하기 때문에, 근교 놀러 가듯 자주 발걸음하기 어려운 게 아쉬울 따름이에요.
최근에는 독일마을로 유명세를 탔지만, 원래 남해는 좋은 멸치가 많이 나는 어장으로 유명해요. 특히 남해 미조항은 코로나 전에는 멸치 축제가 성대하게 열리곤 했죠. 남해 맛집을 검색하면 멸치쌈밥이 자동으로 연관검색어로 뜨는데요, 정작 남해에서 자란 사람은 멸치쌈밥이라는 메뉴가 있는지도 몰랐다면, 믿어지시나요?
시장에서 적당한 크기의 멸치만 접하다 보면, 멸치도 생선이라는 걸 잊곤 해요. 멸치도 어른 손가락보다도 몸집이 굵은 녀석들도 있는데요. 남해에서는 굵은 멸치를 생선조림하듯 매콤하게 졸여서, 해초나 쌈채소에 싸 먹곤 했다고 해요. 외지사람들에게는 독특한 향토음식으로 인식된 멸치쌈밥이 남해 사람들에게는 집에서 자주 해 먹던 따로 이름도 없는 생선조림이었던 거죠.
누군가에게는 집에서 먹는 평범한 생선조림이 어떻게 이름을 붙이고 의미를 부여하는가에 따라서 별미가 되기도 하는 걸 지켜보면서, 평범함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어요. 나에게는 평범한 일상이 남들에게는 특별한 하루가 될 수도 있겠다 싶더라고요. 반복되는 하루를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본다면, 무채색의 지루한 일상에서도 무지갯빛의 두근거림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현대화된 죽방렴, 정치망
죽방멸치에 대해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죽방 또는 죽방렴은 어구가 지금처럼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 섬과 섬 사이 물길이 좁아져 유속이 빨라지는 구간에 긴 대나무 막대기를 꽂아 물고기를 유인한 다음, 그 사이를 대나무로 엮은 발이나 그물로 막아서 물길을 따라 들어온 물고기를 잡는 어획방식을 말해요. 그물에 갇힌 멸치를 퍼올리는 방식으로 잡기에, 멸치의 손상을 최소화할 수 있어요. 그만큼 비싼 가격으로 팔리죠. 지금도 남해의 바닷가를 다니다 보면, 곳곳에 죽방을 설치해 놓은 모습을 볼 수 있어요.
죽방
두레생협에 멸치를 공급하는 삼양수산은 죽방의 원리를 이용한 정치망 어법으로 멸치를 잡고 있어요. 정치망은 말 그대로 물고기들이 지나다니는 길목에 고정적으로 그물을 설치해 놓고 물고기를 잡는 어업방식을 말해요. 매일 새벽 설치된 그물을 끌어올려 펄떡이는 멸치를 뜰채로 건져낸 뒤, 배 위에서 바로 삶아내고 있어요. 뜰채로 퍼내기 때문에 멸치의 형태가 그대로 유지되고, 배 위에서 바로 삶아내기에 더욱 신선하죠.
멸치를 삶을 때는 바닷물 정도로 염도를 맞춘 소금물에 멸치를 삶아내는데, 삼양수산에서는 5년 이상 간수를 뺀 소금을 사용해요. 오랜 시간 간수를 뺀 소금은 쓴맛이 사라지고 대신 은은한 단맛이 돌거든요. 소금도 꼭 필요한 만큼만 넣습니다. 소금을 많이 넣으면, 더 넣은 소금의 양만큼 멸치의 무게가 올라가게 되고, 부풀린 무게만큼 값을 더 받을 수 있거든요. 하지만 삼양수산은 누가 보지 않아도 눈속임 없이 정직하게 멸치를 삶아내고 있어요. 오랫동안 조합원들로부터 멸치가 짜지 않아 좋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는 게 그 증거죠.
갓 잡은 멸치
멸치를 뜰채로 퍼올리는 모습
배 위에서 바로 삶아낸 멸치
직접 잡고 말리는 특별한 멸치
고정된 그물에서 건져 올리는 정치망 외에도 멸치를 잡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어요. 어선 2척이 그물을 양쪽에서 끌고 멸치 떼를 쫓아가면서 잡는 대향 권현망 방식, 멸치 떼가 지나가는 길목을 파악하고 그물을 펼쳐 그물에 꽂힌 멸치를 잡는 유자망 방식도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정치망으로 잡은 멸치는 손상이 가장 적고 배 위에서 바로 삶아 품질이 뛰어나다 보니, 가격이 비싼 편입니다. 삼양수산은 정치망과 유자망 두 가지 방식으로 멸치를 잡는데, 유자망으로 잡은 멸치는 주로 공판장에 경매로 내거나 액젓을 만들고, 정치망으로 잡은 멸치는 건조해서 마른 멸치로 공급합니다.
마른 멸치 선별
일반적으로 바다에서 멸치를 잡으면 바로 공판장에서 경매로 중매인들이 사들이고, 중매인들이 사들인 멸치를 다시 받아서 건조하거나 액젓으로 가공해요. 이렇게 어획과 가공이 분리되어 있는 경우가 많은데, 삼양수산은 직접 잡은 멸치를 손수 말리고, 액젓을 담그는 조금 특별한 생산지예요.
생산 전 과정을 직접 관리하다 보니, 품질에 대한 자부심도 남다릅니다. 생산자의 얼굴을 포장재에 싣는 것도 이런 자신감에서 비롯된 거죠. 삼양수산 황세진, 우재순 생산자와 이야기를 나눌수록 내 손으로 모든 걸 해냈을 때의 성취감, 전 과정을 지켜본 사람만이 가실 수 있는 당당함이 느껴졌어요.
알 수 없는 내일을 두려워하는 대신
멸치를 잡으러 가기 위해선 이른 새벽부터 부지런히 움직여야 합니다. 유자망은 새벽 2시에 일어나서 항구로 출발해요. 새벽 3시에는 항구에 도착해서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야 하거든요. 배를 타고 1시간 반에서 2시간 정도 나간 다음, 멸치 떼를 찾아 그물을 내렸다가 끌어올리는 방식으로 멸치를 잡아요. 멸치가 많이 잡히면 점심때쯤 항구로 들어오지만, 멸치가 안 잡히면 10시간 넘게 배를 탈 때도 있죠.
새벽 4시의 바다항구로 돌아왔다고 일이 끝나는 건 아니에요. 그물에 걸린 멸치를 털어내야 하는데, 선원 7명 정도가 한 줄로 서서 온몸을 이용해 힘껏 그물을 털어야 해요. 기계로 털어보려고도 시도했지만, 사람이 하는 걸 따라갈 수 없었다고 해요. 그래서 여전히 사람들이 멸치를 털고 있죠. 보통 힘든 일이 아니라서 멸치 한 번 털고 일을 그만두는 사람이 부지기수라고 해요.
이왕 남해까지 내려왔으니, 함께 배를 타고 멸치를 잡아서 삶는 과정을 직접 보기로 했어요. 정치망 어업현장을 보기 위해 새벽 3시에 일어나야 했어요. 졸린 눈을 비비며 차를 타고 한참 이동하니, 항구에 새벽 4시쯤 도착할 수 있었어요. 배를 타고 15분쯤 나가니 어장이 나타났어요. 정치망에는 멸치 외에도 다양한 어종의 물고기라 함께 잡히기도 해요. 새벽 3시에 일어나 배를 탄 특전으로 갓 잡은 꼴뚜기와 한치를 맛봤는데, 이른 새벽부터 멸치 잡는 현장에 따라가길 잘했다 싶더라고요. 특히 씹을수록 은은한 단맛이 올라오는 한치회는 정말 별미더군요.
갓 잡은 한치
정치망으로 멸치를 잡는 건 다른 어법에 비해 쉬워 보이지만, 여기에도 맹점이 있어요. 매일매일 그물에 걸린 멸치를 걷어 올려야 한다는 거죠. 멸치가 많이 잡힌 날은 하루에 2~3번씩 바다에 나가서 멸치를 잡아 올려요. 건조장은 한정되어 있는데, 잡은 멸치는 당일에 말려야 하니 건조기로 멸치를 말리고 빼고, 또 말리고 빼고 하는 작업을 밤새 반복해야 해요. 멸치를 말리고 눈 붙일 새도 없이 바로 다음 날 새벽에 잡아온 멸치를 다시 말리는 일을 반복하다 보면 곡소리가 절로 납니다.
무엇보다 힘든 건 언제 얼마나 일이 쏟아질지 예측이 안된다는 거라 생각이 들었어요. 수십 년 바다에 나가 멸치를 잡아왔지만, 내일 멸치가 얼마나 잡힐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말씀하시더군요. 멸치가 안 잡히면 선원들 월급 줄 걱정을 하게 되고, 멸치가 많이 잡히면 일거리가 몰려 잠을 못 자니 그것대로 힘들고, 옆에서 지켜보면서 이래저래 힘들겠다 싶었어요.
말씀을 그렇게 하셔도 파도에 몸을 맡기듯 바다가 주는 대로 사는 일에 익숙해지셨는지 얼굴은 그리 불안해 보이지 않았어요. 가끔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과 걱정으로 하루를 그냥 흘려보낼 때가 있어요. 원래 인생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다는 걸 까맣게 잊은 채 말이죠. 앞으로는 내일에 대한 근심이 몰려올 때면, 이른 새벽부터 바다로 나가는 어부들을 떠올리기로 했어요. 멸치가 얼마나 잡혔던지 간에, 매일 바다로 나가는 오늘의 꾸준함이 내일에 대한 두려움을 지운다는 걸 배웠으니까요.
안전한 길로는 결코 닿을 수 없는
정치망으로 멸치는 잡는 과정은 크게 2단계로 나뉘어요. 처음 그물을 끌어올리면 잡어라고 불리는 다양한 물고기들이 올라와요. 조기부터 갈치 새끼, 꼴뚜기, 한치 등이 대부분인데, 가끔씩 도미나 복어, 날치 같은 생선도 볼 수 있죠. 그 밖에 이름을 알 수 없는 다양한 물고기들은 배 한쪽에서 종류별로 분류합니다.
복어
날치
주로 잡히는 갈치는 액젓으로 만들고, 꼴뚜기나 한치는 따로 모아서 말립니다. 횟감으로 쓰이는 생선은 활어로 팔기도 하고요.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은 잡어들은 따로 모아 발효시켜, 액비라고 불리는 거름으로 만듭니다. 생선을 발효한 거름은 아미노산, 칼슘과 인 등 영양 성분이 풍부해, 특히 화학비료를 안 쓰거나 적게 쓰는 친환경 농가에서는 언제나 환영입니다.
액젓도 멸치와 마찬가지로 직접 잡은 물고기로만 만드는데, 외부의 커다란 항아리에서 최소 2년 넘게 숙성합니다. 소금을 많이 넣으면 부패될 일도 없고 실패할 일도 생기지 않아요. 다만 짠맛이 감칠맛을 덮기 때문에, 액젓의 풍미를 제대로 느낄 수 없죠.
발효 중인 액젓
삼양수산 황세진, 우재순 생산자는 마른 멸치를 삶을 때처럼, 액젓에도 발효의 감칠맛을 극대화하기 위해 꼭 필요한 만큼의 소금을 넣습니다. 발효 상태가 유지되면서도 소금의 양을 줄일 수 있는 황금비율을 찾는 과정에서 엄청난 양의 액젓을 버렸다고 해요. 특히 생선마다 크기나 굵기가 다르다 보니 필요한 소금의 양도 다른데, 그 사실도 수많은 실패 끝에 겨우 알아냈다고 해요.
한 번은 삼양수산의 갈치액젓을 맛본 한 조합원이 직접 전화를 했는데, 50 평생 이런 맛이 나는 액젓은 처음이라며 이런 액젓을 만들어줘서 정말 고맙다고 감사인사를 전했다고 해요. 만약 다른 곳에서 하던 대로, 안전한 방식으로만 액젓을 만들었다면, 누군가를 감동시킬 수는 없었을 겁니다. 지금도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걸으며, 넘어지면서도 꿋꿋하게 앞으로 나가는 이들을 봅니다. 언젠가 반드시 이들의 노력이 사람들에게 전해져, 마음을 움직이고 감동을 전해주겠지요.
고요한 새벽을 가르며 항구로 가던 어둑어둑한 길. 잠잠한 바다와 대비되는 배 위의 숨 가쁜 움직임. 그리고 펄떡이는 은빛 멸치. 멸치가 식탁에 오르는 과정을 지켜보며, 누군가의 달콤한 새벽잠과 맞바꿔 얻어진다는 걸 새삼 깨달았습니다. 멸치뿐일까요. 지금 우리가 당연히 누리는 것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수고하는 누군가가 있기 때문이겠지요. 그 사실을 너무 쉽게 잊고 산 건 아닌지 돌아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