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서 ‘책바보’라는 동호회를 운영 중이다. 책바보는 ‘책을 바꿔 보는 모임’의 준말로, 말 그대로 서로의 책을 돌려보는 모임이다.
동호회 진행 원칙은 매우 간단하다.
참여 자격은 자신 책 두 권 이상을 소유한 지류 서적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책에 대한 제한은 특별히 없는데, 남들에게 추천할 만한, 돌려보다가 약간의 훼손이 생겨도 너그럽게 이해할 수 있는 책이면 된다.
일정 신청기간 동안 회원을 접수한다. 인원 제한은 없는데, 기간 제한이 있다. 참여 인원이 확정되면 적당한 규모로 조를 편성한다. 6명에서 8명 정도가 적당하다. 4명으로 구성하더라도 아기자기하게 굴러가는데, 10명이 넘어서면 다소 산만하고 지루해진다.
조 편성을 마쳤으면, 각자 자기가 가져온 책에 대해서 무슨 책을, 어떤 의미에서 골랐는지 간단히 소개한다. 이건 책바보 모임 기간에 유일하게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기회이기도 하다.
책을 돌려볼 순서를 정한다. 한 달에 한 번, 책 전달 기간을 지정해서 현재 가지고 있는 책을 다음 사람에게 넘긴다. 한 바퀴 돌아서, 즉 6명이 한 조였다면 6개월 걸린다, 내 책이 다시 내 손에 들어오면 한 기수의 모임이 끝난다.
전체 인원이 한데 모여 쫑파티를 하고, 다음 기수 모임을 계속 할 회원들과 신규 회원 접수를 해서 다시 조를 꾸려서 이어간다.
이렇게 하면 대략 1년에 스무 권 이상의 다양한 책을 ‘만져’ 볼 수 있다. (차마 모든 책을 ‘읽어’ 봤다고 말하긴 어렵다.)
수년 동안 운영을 하며 다음의 규칙이 추가되었다.
미련 버리기. 무조건, 책을 읽었던 못 읽었던, 전달시기가 되면 다음 사람에게 책을 넘긴다. 아직 채 결말을 맛보지 못한 책이 있더라도 이 원칙은 무조건 지켜야 한다.
아묻따. 책을 읽었는지 안 읽었는지는 아무 것도 묻거나 따지지 않는다. 본인 취향이 전혀 맞지 않은 책이 전달될 수도 있고, 회사 업무로 바빠서 책을 펼쳐볼 시간이 없었을 수도 있다. 절대 그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다는 철칙이 생겼다.
스포일러 방지. 오프라인에서든 온라인에서든 지금 읽고 있는 책에 대해서 너무 심도있게 평하거나 설명하지 않는다. 입과 손가락이 근질거리더라도 낯선 책의 즐거움을 빼앗지 않기 위해서 자제한다.
의견 남기기. 다른 사람의 소중한 책이니 되도록 오염되거나 훼손하지 않게 조심하며 읽는다. 그리고, 혹시 책 주인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말이 있거나, 나라면 밑줄 그어두겠다 싶은 구절을 발견하면 포스트잇 등을 이용해서 흔적을 남긴다. 책이 주인에게 다시 돌아갔을 때 여행의 흔적이 남을 테니까.
이 모임의 장점은 이렇다.
나라면 절대 도서관이나 서점에서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책을 펼쳐보게 된다. 추리소설, 공상과학소설, 자기계발서 등은 내 취향과 맞지 않다고 여기던 터였는데, 숙제처럼 전달된 책을 펼쳤더니 그 내용에 쑥 빠져든 경우도 많다. 나의 선입견이 참으로 옹졸했다는 후회를 하며...
남이 밑줄 그어둔 구절이 가져다주는 호기심이 있다. 이럴 때면, 카롤린 봉그랑의 작품 ‘밑줄 긋는 남자’가 얼핏 생각나기도 한다. 책의 원 주인은 이 문구를 읽으며 도대체 어떤 상황에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지 떠올려 보게 된다.
한 권을 놓고 서로의 의견을 나누는 독서토론 모임과는 확연히 다르다. 이런 모임은 ‘이 책은 이렇게 읽어야 한다’고 규정하는 것 같아서 싫다. 그냥 자신의 느낌으로 오롯이 자신의 책으로 읽고 남기면 된다고 여기는 편이다.
처음으로 책바보 동호회를 만들었던 것은 지역 온라인 카페(용인 수지를 사랑하는 사람들) 내 소모임이었다. 2014년 5월에 시작했고, 현재까지도 십 년이 훌쩍 넘도록 꾸준히, 그리고 활발히 운영되고 있다. 현재는 지역 모임 대신에 회사 모임으로 옮겨 활동하고 있지만, 지역 모임을 할 당시 써니의 케이크 매장은 책바보 아지트였다. 오프라인 모임도 자주 개최했었고, 책을 전달하는 창구로도 종종 애용되었다. 작은 서가 옆에 낯선 책들이 포스트잇과 함께 놓여 있으면 책바보 회원의 책이었다.
내 책이 수 개월간 타인의 품으로 여행하고 돌아왔을 때, 나는 그 책을 '다시 읽는' 것이 아니라 그 책이 겪은 '시간'을 마주한다. 낯선 이가 붙여둔 포스트잇은 그가 내 문장에 머물다 간 발자국이다.
이제 써니의 케이크 매장은 더 이상 공식적인 책바보 아지트는 아니지만, 여전히 나는 매장 서가에 내가 읽은 책을 꽂아두며 누군가에게로의 '우연한 여행'을 꿈꾼다. 일방적으로 정보를 전달하는 지식의 창고가 아니라, 서로의 취향이 섞이고 흔적이 쌓이는 이 느슨한 연대야말로 내가 꿈꾸는 가장 인간다운 소통이다. 책 한 권 바꿔 읽었을 뿐인데, 세상에 나를 이해해 줄 '바보'가 몇 명 더 늘어난 기분이라면 이 역시 꽤 남는 장사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