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가끔 탈주를 꿈꾼다

by 영두리
매일 똑같은 일상에서 일탈.
길 안내 잠시 끄고 경로에서 이탈.
머리 아픈 생각 접어두고 해탈.
남들에게 걸리지만 않으면 무탈.
그러다가 딱 걸리면 허탈.
나 자신에게 부려보는 소심한, 앙탈.


언젠가 끼적여 두었던 ‘탈주’라는 제목의 시가 떠올랐다. 딱 오늘 같은 날이다.

멀리 이동해서 진행한 장시간 회의는 공들인 시간이 아까울 정도로 허탈하게 끝나고, 어정쩡한 시각이라 사무실에 복귀하기에도 어설프고, 그렇다고 써니 매장에 일찌감치 출근(!)하기에도 애매한 날. 머릿속은 복잡한데 생각이 정리되지 않고, 누군가와 말을 섞는 게 부담되고, 혼자만 아는 동굴이 있다면 잠시나마 숨어 들어가 있고 싶어지는 날.

그런 날은 굳이 거울을 보지 않더라도 나의 상태를 어림짐작할 수 있다. 오후 5시의 그늘이, 이른 시각임에도 벌써 얼굴 가득 번져 있을 테다. 까닭 모를 답답함에, 뱉을 말을 삼켜 한숨으로 바꾼다. 이럴 때는 낯선 곳, 낯선 시간, 낯선 사람 속을 꿈꾸게 된다. 한창 철없던 시절, 혼자만의 여행을 정의할 때 그랬듯이.


수년 전 어느 늦가을에 있었던 일이다. 세종시에 있는 관공서에 들러 용역 입찰평가 제안발표와 질의응답을 큰 무리 없이 진행하고 마쳤다. 함께 현장에 갔던 일행들이 고생했다며 식사라도 같이하고 올라가자고 권했으나 영 내키지 않았다. 급히 가볼 데가 있다며 식사는 다음 기회로 미루고 자리를 벗어났다. 승자가 독식하는 The winner takes it all 절대원칙이 존재하는 이 업계에 적응할 만도 한데, 제안서는 제출 당일까지 모든 걸 쏟아붓게 하고 제안발표는 발표장을 나서는 순간까지 신경을 예민하게 만든다. 오롯이 혼자만의 시간과 공간이 필요한 때다.


차에 앉아서 일단 시동을 켜고 내비게이션을 실행했으나 거기서 딱 손을 멈췄다. 즐겨찾기 되어 있는 행선지가 아닌 다른 곳이 절실히 필요하다. 하늘을 보니-하늘 본 지도 꽤 오래되었구나 생각하면서- 늦가을 푸른 하늘과 심심찮게 떠 있는 구름 모양이 이쁘다. 갑자기 바다가 보고 싶어졌고, 언젠가 눈여겨 봐두었던 궁평항 풍경 사진이 떠올랐다.

목적지는 분명 궁평항이었는데, 화성방조제를 들어설 무렵 아담한 항구 매향항을 발견하고는 차를 멈췄다. 매서운 바닷바람이 나를 반기듯 들러붙는데 그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서쪽 하늘에서는 해가 뉘엿뉘엿 지면서 저 멀리 섬에서부터 바로 앞 갯벌까지 온통 붉게 물들였다. 심심하던 차였는지 갈매기들만이 새로운 방랑객을 반겼다. 한참을 걸었고, 걷다가 사진을 찍었고, 다시 걸으며 나지막이 노래를 불렀다.


어둑해질 때까지 배회하며 머물다가 차로 돌아와 앉는다. 어둠이 귀소본능을 일깨운다. 시동을 켜고 히터를 넣어 차갑게 식은 차 안 공기를 덥히며 내비게이션 목적지를 선택한다. 예외 없이 즐겨찾기 첫번째 목적지인 매장을 누른다. 어두컴컴한 국도를 급할 것 없는 속도로 달리며, 창 밖 옆으로 줄곧 따라오는 조각달을 힐끔힐끔 감상한다. 귀갓길에 외로울까 봐 따라나선 듯 한참을 따라온다. 한 시간 남짓 달려서 매장에 도착한다.


좀 늦었네? 밥은 먹었어?
어? 응. 올라오면서 간단히 먹었어.


언제나 써니는 식사 여부부터 챙긴다. 생각해 보니 시장기마저 사치인 듯 저녁식사도 잊고 있었다. 밥도 안 먹고 다닌다고 걱정할 것 같아서, 그 걱정이 다른 걱정으로 커질 것만 같아서 하얀 거짓말을 한다. 탈주는 완전범죄여야 하므로 일말의 의심조각도 남겨서는 안 된다.

서둘러 매장 정리를 돕는다. 매장 홀 청소는 내 담당이다. 요란한 청소기 소리가 불편한 고요보다 낫다. 테이블을 가지런히 정리하고 의자들을 열 지어 맞춰두고 내일의 산뜻한 매장 오픈을 준비한다.


오늘 하루도 고생 많았어.


일부러 큰 소리로, 매일 가게 마감 때 하는 말이지만, 오늘은 좀 더 힘을 담아서 하루의 수고를 격려한다.


자기도 오늘 하루 고생했어.


이 말이 듣고 싶었나 보다. 왜 그랬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묻지 않고, 그냥 일방적인 위로와 공감이 필요했나 보다. 아무런 질문 없이 서로를 안아주고 토닥거려 주는 소소한 마무리를 원했던가 보다.


아직도 가끔, 일상으로부터의 탈주를 꿈꾼다. 그것은 어쩌면 경로를 이탈하는 것이 아니라, 잠시 멈춰 서서 내가 가야 할 진짜 목적지를 다시 돌아보는 기회일 것 같다. 밥 먹었다는 하얀 거짓말 한 조각과 함께 나의 짧은 일탈은 완전범죄로 끝났지만, 사실 써니는 다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내 머리카락과 어깨에 묻어온 바닷바람 냄새를, 그리고 평소보다 조금 더 세게 마주잡은 손의 온기를 통해서 말이다. 내일은 다시 회사의 직장인, 매장의 아저씨 자리로 돌아가겠지만, 마음 한 칸에는 언제든 떠날 수 있는 매향항의 붉은 노을 하나를 숨겨두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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