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설주의보가 내린 날, 수도권에 저녁 때부터 폭설이 찾아올 거라는 기상청 특보와 비상 문자가 연이어 오는데 정작 하늘은 굼뜨게 흐리기만 하다. 성미 급한, 어쩌면 재난대응 매뉴얼에 따른 것일 테지만, 제설 담당자는 이미 온 동네 도로라는 도로마다 눈마냥 염화칼슘을 살포해 두었다. 추워진 날씨에 손님들의 발길도 뜸해지고, 마지막 예약 손님도 케이크를 찾아갔으니 매장을 서둘러 정리하기로 한다.
써니는 현재 재고와 예약전표와 현장 소요를 어림 짐작해서 내일 배송받을 케이크를 온라인 주문하고, 그 날의 매출을 확인한다. 아르바이트생은 주방을 깔끔히 정리하고, 커피 머신을 청소하고, 쇼케이스 조명을 끄고, 진열되어 있던 케이크들을 보관용 박스에 포장한다. 홀 담당인 나는 청소기를 구석구석 돌리고, 테이블과 의자를 열 맞춰서 가지런히 정리하고, 흐트러져 있던 작은 서가의 책들을 챙긴다. 열려 있는 냉장고 문이나 쇼케이스는 없는지 점검하고, 전원들은 제대로 작동되고 있는지 살펴보고, 전등을 소등하고, 원격 경비 시스템을 가동하고 매장을 나선다. 오늘도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서로에게 열심히 지낸 오늘을 응원하고 축복한다. 매일 반복되는 소소한 리츄얼이다.
차를 타자마자 드디어 눈발이 날리기 시작한다. 폭설이 내릴 거라고 하니 걱정이 앞서기도 하지만 눈이 내리는 풍경은 언제나 이쁘다.
눈이 참 이쁘게 오네.
마치 케이크 위에 슈가 파우더 뿌리는 것 같지 않아?
솔솔솔. 하늘에서 촘촘한 체를 흔들어 곱디고운 눈가루를 온 세상에 뿌려 덮는 느낌이다. 아파트에 도착해서 옷을 갈아입고 다시 창 밖을 내다보았다. 14층 높이 아파트 베란다에서 본 단지 풍경은 가로등 조명까지 받아서 온통 하얗다. 통행하는 차량도 없고, 지나다니는 사람도 없어서 한 장의 하얗고 이쁜 풍경화처럼 동네가 잠든다.
눈 오는 풍경을 한참 감상하다가, 써니가 만드는 사각산딸기가나슈 케이크가 떠올랐다.
본인이 직접 아이싱과 데코레이션 작업을 하기도 하는 써니는 케이크 시트를 반제품 형태로 납품받아서 마무리 작업을 한다. 사각산딸기가나슈 반제품은 정사각형 모양의 두툼한 쵸코 시트 형태로 들어온다. 여러 재료를 배합해서 직접 생크림을 만들고, 이것을 쵸코 시트 위에 평평하게 바른다. 말 그대로 타불라 라사(tabula rasa)의 상태가 된다. 깨끗하게 비어있는 석판, 아무 것도 적혀 있지 않은 백지 상태, 해가 바뀌면서 새로 신년 다이어리를 받아 펼칠 때의 느낌. 그 상태에서 잠시 멈추고 생크림의 상태를 체크하고 빈 석판을 채울 다음 단계를 준비한다.
페이스트리 백, 일명 짤주머니에 생크림을 잔뜩 담고 쥐어짜서 장미 봉오리 모양을 가지런히 얹는다. 스몰 사이즈 케이크는 가로 세로 4개씩 16개, 라지 사이즈 케이크는 가로 세로 5개씩 25개의 하얀 장미 봉오리가 줄지어 놓인다. 준비 작업은 여기서 마치고, 제품 진열도 이 상태그대로 둔다.
산딸기는 고객의 구매 주문이 들어오면 그제야 하얀 장미 모양 봉오리 위에 하나씩 올린다. 달콤함에 새콤함을 더한다. 모든 봉오리에 산딸기를 올린 후 슈가 파우더를 솔솔솔 뿌려 마무리한다. 마침내 새하얀 눈밭에 빼꼼 산딸기들의 빨간 자태를 드러낸 듯한, 그리고 눈을 살짝 덮고 있는 듯한 사각산딸기가나슈케이크가 완성된다.
한참을 케이크 같은 풍경 감상에 빠져 있다가, 내일은 일찍 매장을 나가서 행인들이 가게 앞 쌓인 눈을 밟아서 빙판을 만들기 전에 서둘러 눈을 치워야겠구나, 하며 현실로 돌아온다. 하지만 내일 일은 내일 일이고, 이 평화로운 풍경을 조금 더 눈에 담아두고 싶다. 하늘이 온 세상에 '슈가 파우더'를 넉넉히 뿌려준 덕분에, 오늘만큼은 지저분한 골목도, 삭막한 도로도 근사한 케이크가 되었으니까.
내일은 우리 매장을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이 하얀 설경을 닮은 케이크 한 조각을 건네고 싶다. 세상이 슈가 파우더로 덮이는 날, 누군가의 마음 위에도 새하얀 위로가 소복이 쌓이기를 바라며. 눈을 치우는 고단함보다 눈을 감상하는 설렘을 먼저 떠올리는 것, 그것이 이 겨울을 가장 달콤하게 지나는 법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