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고 있던 단어 하나가 떠오르면서 감자줄기 훑듯이 줄줄 여러 생각이 따라 올라오는 경우가 있다.
'랩걸(Lab Girl)'이라는 책을 읽다가 까닭없이 '부름켜'라는 단어에 턱 걸렸다. '형성층'이라는 단어보다, 'cambium'이라는 서양어보다 따뜻하고 고급스럽다. 어원에 대한 설명이 '붇-+-음+켜'인 걸로 봐서, '몸이 붇다'와 같이 부피가 커져서 생기는 '층'을 나타내는 말에서 유래된 말이다.('부둥켜'와는 무관하다!)
쌍떡잎식물의 줄기에는 물관과 체관을 구분 짓는 이 부름켜가 중간에 존재한다고 한다. 뿌리로 흡수한 수분과 양분을 줄기의 물관을 통해 잎으로 보내고, 잎은 햇빛을 재료 삼아 광합성을 해서 포도당을 만들어 체관을 통해 뿌리로 보낸다. 이 층은 세포분열을 하며 커지는데, 봄에는 활발하게, 가을에는 소소히 분열하다 보니 짙은 갈색의 나이테를 만든다, 는 게 추억 속 언젠가 수업 시간에 배웠던 내용이며, 생각난 김에 뒤져본 백과사전식 지식이다.
나이테라는 것을 학교에서 배우고 나서, 동네 앞산에 올라 밑둥만 남아 있는 나무 그루터기의 동심원을 보며 나이를 센 적이 있었다. 군 시절에는 나침반 없이 방위를 알고자 할 때 나이테의 두꺼운 쪽을 남쪽으로 보면 된다는 교육도 받았었다. 세월 속에 그저 한없이 멈춰 서있는 듯한 나무는, 해마다 뿌리를 더 깊게 내리고 키를 키우고 부름켜를 넓혀가면서 내가 알지 못하는 동안에도 아무도 모르게 크고 있었나 보다.
매장을 함께 마감하고 집으로 가는 길, 써니와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써니가 화들짝 놀라며 웃는다.
자기, 드디어 흰 머리 났네.
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쳐 보니, 구레나룻의 시작점인 왼쪽 귀 옆에 은빛의 가느다란 짧은 머리카락이 한 가락 삐죽 올라와 보였다. 써니는 '뽑자'고 덤볐으나, 이제 우리 나이에는 새치가 아니라 백발이라던 친구들의 말을 받아들인다면, 이 녀석은 내 인생 첫 백발로 기념해야 하니 건들지 말라고 선언했다.
문득 나이를 확 먹은 느낌, 이라며 엄살을 부린다. 은빛 머리카락 하나 때문에...
끔찍한 생각일 수 있지만, 내 일부를 톱으로 켜본다면 몇 개의 부름켜가 나올까 떠올려 보았다. 성장하고 움츠리고, 들떠서 치닫고 결국엔 돌아서고, 애타게 사랑하고 마침내 실망하면서 만들어온 내 인생의 부름켜는 몇 개나 될까? 어쩌면 그 개수가, 남들이 말하는 숫자에 불과한 나이보다 인생의 깊이를 나타내는 나이가 되지는 않을까 싶어졌다.
외떡잎식물은 부름켜가 없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굵은 줄기로 성장하거나 다년생식물로 삶을 영위하지 못한다. 열대우림지역의 나무들도 나이테가 없다고 한다. 연중 고온다습한 환경에서 살아온 이들은 세포분열을 멈추고 삶을 돌아볼 새 없이 그저 덩치만 키우게 된다.
인생에 남은 적당한 부름켜 성장 흔적은, 그때는 비록 어렵고 지겹고 힘든 상흔이 될 수 있지만, 지나고 나면 빛나는 주름살이 될 것 같다. 밋밋한 인생 따위는 태어난 이후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던 인생의 질곡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그렇게 해석하는 것이 자기위안일 것이다.
뒤늦게, 부름켜마냥 삐죽 튀어나온 백발을, 부둥켜 안고 환영한다. 오늘, 또 어떤 종류의 부름켜를 만들고 있는 것일까? 아마도 오늘 내가 쌓은 켜는 '피곤함'이라는 거친 질감보다는, 써니와 함께 웃으며 마감한 '다행함'의 질감에 더 가까울 것이다. 인생의 겨울이 찾아와 성장이 잠시 멈추는 날이 오더라도, 내 몸 속에 새겨진 촘촘한 동심원들이 나를 단단히 지탱해주리라. 굵어지는 줄기만큼 깊어지는 마음으로, 내일은 오늘보다 조금 더 짙고 선명한 부름켜 한 줄을 그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