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우연사전

[우연사전]: (38) 허물다

우연히 발견한 단어로 필연한 문장을 씁니다.

by 두리뭉실

허물다

동사

1. 쌓이거나 짜이거나 지어져 있는 것을 헐어서 무너지게 하다.

2. 꼿꼿하고 방정한 표정, 자세, 태도 따위를 그대로 유지하지 아니하고 구부리거나 느른하게 하다.

3. 사회적으로 이미 주어져 있는 규율, 관습 따위를 없어지게 하다.

4. 심리적으로 이미 주어져 있는 생각이나 믿음 따위를 없애다.




주변의 모든 것들이 허물어져 가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예전처럼 길거리에는 사람이 없고, 활력도 사라졌다. 시끄러워 눈을 찡그리게 했던 순간들도 언제 그랬는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오래되었고, 고요함만이 텅 빈 공간을 가득 채운다. 분명 달라진 건 없는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세상이 색을 잃어가고 흑백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새로움을 위해 허문다. 하지만 허무는 것과 허물어 가는 것은 다르다. 허무는 것은 추후의 찬란한 미래를 기대하며 체계적인 계획에 의지하며 오래된 것들을 과거로 남겨두기 위한 주체적인 행위이다. 하지만 허물어간다는 것은 과거와 맞닿은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 무너져가는 것을 내버려 두는 방관적 행위이다.


허물어 가기 전에 허물어야 한다. 하지만 허물어야 하는 힘조차 없는 무기력한 세상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니 어쩌면 불안하고 막연한 미래에 또다시 힘들어질 바에는 다 헐어가는 과거라도 붙잡고 싶은 건 아닐까. 한편으로, 허문다고 해서 더 나은 세상이 될 수 있을지, 그것도 잘 모르겠다. 멀지 않은 미래는 어떤 모습일지 정말 궁금하다. 기대가 되어서가 아니라 걱정이 되어서.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우연사전]: (37) 방황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