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담 Aug 11. 2015

그리기에 대하여

기온이 지나치게 높은 하루였다. 너무한거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였다. 발걸음은 물먹은 솜처럼 무겁고 축축 늘어진다. 집으로 가는 지하철 안에는 차갑고 습한 공기가 사람들을 대신하여 자리에 비집고 앉아 있다. 빈 자리를 찾지 않아도 된다. 이 시간에는 사람이 많이 없어소 빈 자리가 넉넉하다.

건너편 좀 떨어진 자리에 소매가 낡은 셔츠를 입은 아저씨가 큰 대 글자 모양으로 누워있다. 철 지난 남색 넥타이는 위태롭게 목에 매달려 있다. 바닥에 닿을듯 늘어져 있는 왼쪽 팔 끝에는 자켓이 살짝 쥐어져 있다. 이 더운 여름에 저렇게 더워보이는 자켓이라니... 나는 저 분이 술에 취한게 아니라 어쩌면 더위에 취한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든다. 이윽고 프랭크 시내트라의 마이웨이를 흥얼거리기 시작한다. 구성지게 앞 부분을 부르더니 후렴구에 도달해서는 목청이 커진다. 절절함이 묻어나는 노래에 자리마다 앉아있는 습한 공기마저 눈물을 떨구고 있다. 저 신사 분이 부른 마이웨이를 들으며 진정한 노래는 가슴으로 부른다는 흔한 말이 그냥 만든 말이 아니구나 생각했다.

가방을 열어 손바닥 만한 스케치북을 꺼낸다. 다이어리로 파는 무선지 노트지만 나는 스케치북으로 쓴다. 남들은 일년에 다이어리 하나 쓸 때에 나는 서너달에 다이어리 한 권 씩은 쓰는 것 같다. 다이어리를 사러 나가는 날에 겸사겸사 사람 구경도 하러 다니기도 하고 때로는, 잘 차려 입고 백화점을 돌아다닌다. 백화점 직원 분들과 밀당을 하기 위해서다. 포인트는 살듯말듯. 밀당에서 이기려면 물건을 선뜻 구매하면 안된다. 굳이 꼭 사야할 물건이 없다면, 아무것도 사지 않고 나와야 한다. 내 손에 돈을 쥐고 있을 때만 손님은 왕이다라는 말의 효력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또한 물건보다 중요한 것은 현금이라는 것을 절절히 알기에 충동 구매도 줄일 수 있다.

어릴때부터 그림을 그리기를 좋아했던 나는 누나들 손을 잡고 공원으로 산으로 그림을 그리러 다녔다. 스캐치북과 물감, 물통과 몇 개의 붓으로 구성된 화구를 들고 잔디밭에 다다르면 준비해온 도시락을 나눠 먹고 스케치북에 이것 저것 그리곤 했다. 나는 주로 나무를 관찰하며 그리기를 좋아했다. 비슷해보이지만 나무는 모두 개성을 갖고 있다. 가지의 모양과 잎사귀의 모양도 비슷해보이지만 조금씩 다르다. 두툼한 돗자리를 푹신한 잔디 위에 깔고 나무들을 그리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았다. 그때 그 어린 시절이나 지금이나 나는 딱히 바라는게 많지 않다. 펜과 종이만 있으면 거의 모든게 해결 된다. 그림도 그릴 수 있고, 글도 쓸 수 있기 때문이다. 비교적 쉽게 몰임 상태에 빠져들기 때문에 몇시간이 금방 지나곤 한다. 욕심을 좀 내보자면, 바로 푸른 하늘과 녹색의 잔디다. 아아. 더할나위 없이 좋다. 누나들 덕분에 추억이 많다. 고맙다. 가끔 그 때가 그리울 때가 있다. 그럴때면, 엎드려서 그림을 그리곤 한다. 지하철이다.

난 지금 그림을 그린다.

매거진의 이전글 아침 풍경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