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이면 김현정의 뉴스쇼를 듣는다. 생방송으로 듣지 못할 때면 녹음방송이 올라올 때까지 기다리곤 하는데 그 동안 라디오를 듣기로 했다.
"눈이 와서 춥긴 하지만 그래도 겨울은 추운 게 정상이겠죠? 눈이 모든 걸 하얗게 덮어주는 것 같아 기분 좋은 아침입니다."
DJ의 멘트와 Mariah Carey의 Open Arms가 울려 퍼지는 순간 음악을 타고 과거로 거슬러 올라갔다.
음악 한 곡을 듣는데도 시간과 정성을 버무려야 하던 때가 있었다. 모두가 잠든 밤이면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DJ의 목소리와 음악에 귀를 기울이던 단발머리 소녀가 있다. 라디오를 듣기 전 지금까지 녹음해놓았던 곡 다음에 테이프를 잘 맞춰놓는 일이 우선이다. 깜빡했다가는 좋아하는 노래가 나와도 녹음할 수 없을뿐더러 이전에 어렵게 녹음해 놓았던 곡 위에 겹쳐져 한 숨과 아쉬움이 밤새 뒤척이게 할 것이다. 테이프 앞뒤 면이 좋아하는 노래로 꽉 채워지면 ‘나의 보물 0호’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테이프가 늘어져 댄스곡이 발라드로 들릴 때까지 듣곤 했다. 별빛마저 잠든 시간,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불안한 현실에서 벗어나 세상을 자유롭게 헤엄쳐 다닐 수 있는 위안이자 친구였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수많은 사연을 들으며 엽서를 보내기도 했지만 내 이야기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일은 없었다. 실망과 기대 속 기다림이 반복될 때면 귓가에 상상의 목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처음엔 꾹꾹 눌러 적은 내 사연을 읽어주는 DJ였던 목소리가 점차 나의 목소리로 변하는 상상을...
국민학생 시절 친구와 집에 모여 싱글벙글 쇼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틀어놓고 멘트를 종이에 받아 적은 후 DJ가 되는 라디오 방송 놀이를 하곤 했다. 그때의 내가 되기라도 한 듯 읽히지 못한 사연을 이야기하는 나의 목소리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DJ의 목소리를 덮기 시작했다. 라디오 DJ가 나라면 그래서 다른 이들과 함께 음악을 듣고 이야기 나눌 수 있다면 어떤 기분일까 하는 상상을 이어가던 1999년 어느 날, 윈앰프를 통한 실시간 인터넷 음악방송이 내 꿈을 현실로 만들어주었다. 방송을 하기 위한 세팅이 끝나고 청취자가 0명인 상태에서 시작되었던 인사말...
"안녕하세요"
허공을 향하던 목소리가 누군가의 귀에 닿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청취자 수의 변화 그리고 두근거림이 DJ가 된 나의 첫 방송 기억이다. 음악 방송이니 신청곡을 받아 들려주거나 음악에 대한 지식을 전하는 게 일반적이었겠지만 내가 그려가는 방송은 전혀 다른 빛으로 채워지고 있었다. 내 이야기를 듣기 위해 그리고 자신이 아는 좋은 노래를 나에게 들려주기 위해 같은 시간에 깨어 있던 이들과의 은밀한 심야 데이트가 하루하루 쌓여갔다.
자신과 무관한 이의 일상을 듣는 일을 좋아하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이제 와 생각하면 의문 가득한 시간이지만, 서로가 어디에 사는지 나이가 몇인지 누구인지도 모른 채 나는 이야기했고 누군가는 들었다. ‘발자국’이라는 DJ 명을 짓고, 홈페이지까지 만들어 다른 공간에 있는 이들과 새벽 늦은 시간까지 이어지던 그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도 시간을 통과하며 희미해져 가기 시작했다. 방송을 했다는 것 외에는 기억이 남아있지 않은 내게 한 통의 이메일이 도착했다. 오래전 방송을 들었던 동생이라며 방송을 통해 많은 걸 느끼고 배웠다는 그리움이 담긴 메일에 눈시울이 촉촉해졌다. 이제 와 생각해보니 내가 라디오를 좋아했던 건 그 속에서 흘러나오는 수많은 목소리나 음악이 좋아서가 아닌 나의 이야기를 들려주고픈 욕망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욕망의 목적지는 흔들리는 나 자신에게 잊어서는 안 될 내 목소리(이야기)를 들려주며 온전한 나를 찾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생각지 못한 이메일에 오래전 그날을 더듬어 본다. 방송을 할 때면 늘 녹음을 해 다시 듣곤 했다.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내 목소리가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점차 목소리가 아닌 내용과 그날그날 달라지는 목소리 톤에 귀 기울이곤 했다. 다음 방송을 잘해보겠다는 의지가 섞인 행동이었지만 그로 인해 ‘나’를 들을 수 있었고 이해할 수 있었다. 아쉽게도 그때의 녹음파일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아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알 수가 없지만 늘 시작하는 멘트는 똑같았다.
“안녕하세요. DJ 발자국입니다. 제 목소리가 들리시나요?”
그때 채팅창에 올라오던 ‘네’ ‘들려요’ ‘안녕하세요’와 같은 반응은 나의 존재를 인정해 주는 토닥임과도 같았다. 오늘처럼 눈이 오는 날이면 그때의 나로 잠깐이라도 돌아가고 싶어 진다. 어쩌면, 두 아이의 엄마가 된 후 기록하는 글들도 또 다른 나의 방송은 아닐까? 나는 오늘도 ‘나’를 쓴다. 그리고 그 끄적임에는 오래전 그날과 같은 멘트가 담겨있다.
내 목소리(이야기)가 들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