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정 엄마를 모시고 병원에 가는 날.
전 날 늦은 시간까지 집수리에 피곤했던 남편에게 자거나 쉬고 있으라는 말을 전하고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난 후 서둘러 친정으로 향했다. 근처 은행에서 볼 일을 보고 친정에 들러 병원으로 가는 길에 엄마의 하소연이 시작된다.
"너희 아빠는 어제도 정신을 잃을 정도로 술을 마셨단다"
그러고 보니 평생 엄마와 통화할 때 즐겁고 행복해하시는 목소리를 들은 기억이 많지 않다. 늘 아빠로 인해 힘든 시간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셨던 엄마는 큰 수술을 한 후 편찮으신 지금도 같은 시간을 반복하고 계신다. 가슴 한 켠에 질문 하나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엄마는 행복했던 적이 있을까?
술에 취하면 "나 힘든 거 아무도 모른다"라며 힘겨움을 토로하시는 아빠 또한 행복과는 거리가 먼 시간에 머물러 있다. 부모님이 원하는 건 이해나 도움이 아닌 힘든 시간을 알아달라는 표현이란 것을 잘 알지만, 지켜보는 답답함과 힘겨움에 도망치고 싶을 때가 있다. 부모님의 불행한 시간 속에서 두려움을 안고 자랐던 내가 떠올라 원망스러울 때도 있다. 나를 더 힘들게 하는 건 내가 느끼는 원망과 힘겨움 뿐만이 아닌 부모님이 느끼시는 그런 감정까지 껴안게 되며 해결 방법도 미워할 대상도 없어지는 상황이다.
그냥 모두가 힘든 것뿐이다.
엄마는 엄마대로 아빠는 아빠대로 나는 나대로...
이 상황에서 내가 바꿀 수 있는 건 '나' 뿐이다.
엄마는 아빠를 향한 힘겨움을, 아빠는 엄마를 향한 원망을 떠올리며 스스로를 괴롭히는 시간 속, 내가 할 수 있는 건 나 또한 부모님을 원망하는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닌 부모님에 대한 안타까움을 나 스스로는 반복하지 않는 것뿐이다.
진료를 마치고 친정엄마를 집에 모셔다 드린 후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필요한 물건을 사고 이사할 집으로 갈 테니 먼저 가 있으라는 남편의 이야기에 집에 먼저 도착해 있으니 갑자기 내린 비에 추웠던 몸이 어느새 따뜻해졌다. 수리를 위해 집이 입고 있던 옷을 벗겨놓은 우리 집을 딸아이는 폐가라고 불렀다. 나 또한 이 공간이 어떻게 완성될지 상상하며 따뜻하게 바라보곤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지금의 모습도 따뜻하게 다가옴을 느낀다.
뜨거운 여름, 철거를 하며 우리의 땀이 집안 곳곳 스며들었고, 회색 빛 집안이 더욱 추워 보이는 요즘 우리 부부의 서로를 위한 배려가 온도를 높여주고 있다. 마음으로 느끼는 온도에는 한계가 있다고 느꼈던 건지 나보다 늦게 도착한 남편의 손에 나를 위한 선물이 한가득 들려있었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선물 보따리를 푼 남편이 설거지를 시작했다. 그리고 준비해 온 버너에 라면 냄비가 올려졌다.
얼마 전 날이 추워지니 따뜻한 커피와 국물이 생각나 버너를 가져다 커피도 타마시고 라면도 끓여먹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했던 적이 있다. 그 이야기를 잊지 않고 준비해 온 남편의 선물 보따리는 명품가방이나 보석보다 더 빛나고 있었다.
"자기야, 우리 캠핑 온 것 같아요~"
내가 받은 감동보다 더 크게 반응하며 즐거움을 표현해 본다. 누군가의 기준이나 가치에 흔들리지 않고 우리 만의 시간을 만들어가며 서로를 배려하는 시간, 이런 시간이 우리 부부의 사랑이다.
"커피도 마셔야지요?"
라면을 끓인 냄비를 씻어온 남편이 커피 물을 올린다.
따뜻한 커피 향을 만끽할 무렵 남편이 또 하나의 선물을 꺼냈다.
집안일을 할 때면 좋아하는 팟 캐스트 방송을 듣곤 한다. 주방, 거실, 베란다에서 끊임없이 왔다 갔다 하며 방송을 듣는 나는 휴대폰을 들고 다니며 방송을 듣곤 하는데, 볼륨을 아무리 높여놔도 설거지 소리 등으로 잘 들리지 않아 불편함을 느끼다 이사 가면 블루투스 스피커를 하나 샀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했던 적이 있다.
"집에서 검색을 해봤는데 너무 종류가 많아서 바로 결정은 못하고 일단 저렴한 걸로 하나 사 와봤어요"
남편 휴대폰 '추억 속 팝송'이라는 폴더를 연결하니 감미로운 노래가 나를 휘감는다.
"오호~~ 저렴한데도 음질 괜찮은데요"
평범하고 작은 것에도 감동하고 고마워하는 나를 보며 남편은 이야기하곤 한다.
"당신이 힘들게 살아와서 다른 이들에게 당연한 것이 감동스럽고, 작은 것도 크게 느껴지는 것 같아요"
남편 말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어제의 큰 힘겨움이 오늘의 작은 힘겨움은 아무것도 아니게 느낄 수 있는 힘이 되어주었는지도 모르겠지만 과거라는 우물에 빠져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서로를 배려하는 사랑을 보지도 느끼지도 못하는 환경 속에서 자랐던 내가 나 스스로를 존중하며 그 토대 위에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시간을 갖기 위해서는 많은 공부와 실천이 필요했다. 그리고 이런 나의 노력에 남편의 사랑과 믿음이 더해져 가족의 행복과 따뜻함이라는 선물을 만들어갈 수 있었다.
집수리를 마무리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늘 서로에게 수고했다는 말을 전하며 꼭 껴안곤 하는데 하루는 문 앞에서 꼭 껴안으며 서로를 토닥이던 우리가 그 자세 그대로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 우리를 본 큰 아이가 한 마디 던졌다.
"엄마, 아빠 같은 부부는 없을 거예요. 진짜 두 분은 천생연분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