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함께 한 부부의 흔한 대화

by 살곰살곰

돈도 못 벌어다 주는 못난 남편 만나서 고생한다고 합니다.

자신과 결혼한 걸 후회하지 않냐고 묻습니다.

고생만 시켜서 미안하다고 합니다.

남편의 말속에는 4년 가까이 회사를 다니지 못한 미안함이 깔려 있습니다.


회사를 다니지 않으면 노는 게 되나 봅니다.

오래된 주택을 사서 철거부터 모든 과정을 직접 해나갔던 시간...

아이들 가까이에서 모든 감정을 지켜보며 함께 해준 시간...

뒤늦게 취업 공부를 하는 아내를 위해 집안일을 해준 시간...

돈을 버는 일은 아니었지만 그 누구도 쉽게 해내지 못하는 큰 일들을 본인이 해왔다는 걸 모르나 봅니다.


"당신 그때 회사 그만 안 두었으면 스트레스로 쓰러졌을 거예요. 그리고 최근 4년이 우리 아이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시기였나요. 전처럼 퇴근 후에도 회사 일로 바쁜 당신이었다면 나 혼자 다했어야 했을 텐데, 내가 힘들었을 거예요. 그리고 지금의 주택을 사서 고치는 일도 엄두도 못 냈을걸요. 지금 우리의 행복이 다 자기의 퇴사에서 시작된 거예요."


경제적 어려움이 아무렇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미안해하는 남편의 마음이 더 무거워질까 내색은 못했지만 생활비 걱정을 하며 답답해질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작은 어려움으로 인해 다른 소중한 가치를 잊는 바보가 되지 않으려 노력했습니다.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보다는 내게 주어진 것에 충실하고자 했습니다.

집을 고치고, 시장을 보고, 밥을 차리고, 산책을 하고, 아이를 키우는 일...

그 모든 시간 우리는 함께 했습니다. 매 순간 서로를 향한 미안함보다는 고마움을 더 표현하려 노력했습니다.

덕분에 서로를 탓하며 힘들어질 수 있는 시간도 아름다운 추억으로 쌓아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 이렇게 항상 함께 했으면 좋겠어요.


24시간을 함께 하는 남편이 건넨 이 한마디에 우리가 살아온, 사랑해온 시간을 돌아보게 됩니다.

부부가 되자마자 큰 아이를 가졌으니 다음 달이면 20살이 되는 아들의 나이만큼 우리가 함께 한 시간도 쌓였습니다. 가끔 서로의 얼굴을 보며 우리도 이제 나이가 들어간다는 말을 하곤 하지만 그 시간만큼 서로를 향한 믿음과 존중 또한 더 커졌음을 느낍니다.


새벽에 출근하는 남편을 위해 4시에 일어나 아침을 준비합니다. 남편이 겨울잠 자는 곰이라고 놀릴 정도로 잠이 많은 나이지만 사랑하는 이를 위한 시간에는 신기하게도 눈이 떠집니다. 해가 뜨기도 전에 출근하는 남편을 보면 마음이 좋지 않습니다. 해줄 수 있는 거라곤 출근하는 남편을 챙겨주는 일뿐인데 그마저도 미안했나 봅니다.


"내가 아침 챙겨 먹고 나갈 테니 자기는 그냥 더 자요"


착한 남편이 미안해하지 않게 아침형 인간이 되어야겠다 생각하던 중 선물 같은 남편의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남편을 보면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어 집니다.

더 멋진 아내, 더 현명한 엄마가 되고 싶어 집니다.

나의 이런 바람을 알았는지 남편은 늘 내게 현명한 아내라고 칭찬해주고 아이들을 잘 키웠다고 고마워합니다.


내게 목표가 하나 더 생겼습니다.

평소 돈을 많이 벌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 나인데 이제는 돈을 많이 벌고 싶어 졌습니다. 돈을 많이 벌어 남편은 돈걱정 없이 좋아하는 일을 하게 해주고 싶어 졌습니다.

나는 '브레인 여보'이니 2022년에는 그 꿈에 조금은 가까워질 수 있을 거라 믿습니다.


늘 그렇듯 훗날 해줄 수 있는 일만 바라보기보다는 지금 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부터 해야 합니다. 일주일 동안 새벽에 나가서 어두워진 후에야 들어온 남편을 위해 푹 쉴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주자 싶었습니다. 크리스마스이니 어디라도 카페든 어디든 가겠냐고 묻는 남편에게 거절 의사를 밝힙니다.


"나가봐야 복잡하기만 하고, 집이 제일 편해요. 그리고 요즘 같은 상황에 나가는 건 현명한 선택도 아니고요."


늦은 시간까지 잠들어있던 남편이 조금씩 움직일 무렵 부엌에 가서 늦은 아침을 준비합니다.

남편이 좋아하는 돌솥비빔밥을 준비해 작은 상에 차려 안방으로 들어갑니다. 요리 솜씨가 좋지 않은 아내와 살면서 한 번도 반찬투정 한 적 없는 남편은 역시나 맛있다는 말을 계속 해옵니다. 상 치우는 일을 도우려는 남편에게 다시 누우라는 손짓을 하고 부엌으로 간 후 커피를 타 옵니다. 침대에 누워 책을 읽고 있던 남편이 환한 미소를 건네 옵니다.


별 다섯 개짜리 호텔에 와 있는 것 같아요


남편의 말 한마디에 우리 부부의 크리스마스는 별 다섯 개짜리 호텔에서의 하루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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