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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의 시선: 김영하,『여행의 이유』

삶을 소설처럼 여행하는 법

by 여기반짝

여행의 속성을 삶에 비교하는 것은 진부하지만, 소설에 비유한 것은 보다 신선했다. 김영하 작가는 이 신박한 서술 방식을 통해 여행이라는 익숙한 소재를 새로운 관점으로 보게 만들었다.

그의 글은 인생의 교훈을 얻기 위한 문학이면서도, 대놓고 가르치려 들지 않아 거부감이 없다. 풍부한 인용과 사례를 통해 여행이나 인생이나 목표한 바를 이루지 못하더라도, 과정에 의미가 있다.'는 어찌 보면 뻔한 메시지를 탁월하게 설득해 낸다. 그는 진정한 '뇌섹남'이다.


여행의 목적을 이룬 성공기는 읽지 않을 것이라는 단호함, 스스로 인지하지 못하는 내면의 신념을 '프로그램'이라 표현한 점, 그리고 여행이란 '섬바디(somebody)'가 아닌 '노바디(nobody)'가 되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라는 정의는, 특별한 사람이 되어야 하고 확고한 취향을 가져야 한다고 믿어온 나에게 큰 울림을 주었다.



1. 실패와 뜻밖의 순간을 예찬하다.


여행의 본질은 성공이 아닌 실패에 있다고 한다. 완벽하게 계획을 성취하는 여행기만큼 재미없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진정한 깨달음은 언제나 예상치 못한 순간에 '벼락처럼' 찾아온다.


“대부분의 여행기는 작가가 겪는 이런저런 실패담으로 구성되어 있다. 계획한 모든 것을 완벽하게 성취하고 오는 그런 여행기가 있다면 아마 나는 읽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재미가 없을 것이다.” (18쪽)

“여행을 통해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되고 자신과 세계에 대해 놀라운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 각성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찾아온다.” (22쪽)

(김영하, 『여행의 이유』, 문학동네, 2019)


결국 인생과 여행은 우리가 원하던 것을 얻지 못하고 시련을 겪는다 해도, 그 안에서 얼마든지 기쁨과 행복을 찾아낼 수 있다는 점에서 신비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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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나를 버리고 '노바디'가 될 용기


우리는 스스로를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신념, 즉 프로그램에 따라 움직인다. 작가는 소설 창작 과정을 빌려 이를 설명한다.

“그건 취향이지 프로그램이 아니잖아요. 프로그램은 인물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신념이잖아요...
‘맞아요. 모르니 말로 내뱉을 수가 없죠. 오직 극 중의 갈등이나 사건을 통해 이런 프로그램이 자기 안에서 작동하고 있음을 깨닫게 될 거예요.”

(김영하, 『여행의 이유』, 문학동네, 2019)


여행은 바로 이 프로그램을 벗어던지는 과정이다. 나이가 들수록 부여된 정체성이 감옥처럼 느껴질 때, 여행은 내가 누구인지 확인하는 행위가 아니라, 잠시 나를 잊어버리고 '아무것도 아닌 자(nobody)'가 되기 위한 탈출이 된다. 김영하는 2,800년 전 호메로스가 『오디세이아』를 통해 이미 여행자의 바람직한 태도를 암시했다고 말한다. 그것은 허영을 버리고 스스로를 낮추는 '노바디'의 자세다.



3. 여행은 소설이다


이 책의 가장 탁월한 지점은 여행을 소설에 비유한 대목이다. 우리는 직접 가서 경험하는 것만이 진짜 여행이라 믿지만, 작가 김영하는 그 믿음에 의문을 제기한다.

“내 발로 다녀온 여행은 생생하고 강렬하지만 미처 정리되지 않은 인상으로만 남곤 한다.
일상에서 우리가 느끼는 모호한 감정이 소설 속 심리 묘사를 통해 명확해지듯, 우리의 여행 경험도 타자의 시각과 언어를 통해 선명해진다.”

(김영하, 『여행의 이유』, 문학동네, 2019)


현실은 줄거리 없이 불쑥불쑥 사건이 일어나지만, 소설은 무의미한 사건을 배제하고 모든 것을 유기적으로 연결한다. 여행은 분명한 시작과 끝이 있고, 낯선 세계에 들어가 변화를 겪고 안전하게 돌아온다는 점에서 현실보다 소설의 구조를 닮았다.

“인간은 왜 여행을 꿈꾸는가. 그것은 독자가 왜 새로운 소설을 읽는가와 비슷하다.... 우리는 이 안전하고 지루한 일상을 벗어나 여행을 떠나고 싶어 한다. 그렇게 고양된 정신으로 다시 어지러운 일상으로 복귀한다. 아니, 일상을 여행할 힘을 얻게 된다.”

(김영하, 『여행의 이유』, 문학동네, 2019)



4. 마치며: 일상을 여행할 힘을 얻다


결국 여행은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불안에서 벗어나 '오직 현재'에 머무르게 하는 힘을 가졌다. 자기 의지로 낯선 곳에 도착해 온 감각을 열어 세계를 느끼는 경험, 한 번이라도 그것을 겪은 사람에게 여행은 인생의 새로운 '원점'이 된다.

김영하의 『여행의 이유』는 우리에게 묻는다. 안전하고 지루한 일상이라는 소설의 한 페이지를 넘기고, 다음 챕터로 떠날 준비가 되었는가? 이 책은 그 여행을 통해 다시금 우리의 복잡한 일상을 살아갈, 혹은 '여행할' 힘을 얻게 해주는 소중한 안내서다.



⭐ 평점과 추천 이유


별점: ★★★★☆ (4/5점)

한 줄 추천: 가끔 숨 쉬는 법을 잊은 소시민이 어디론가 떠나야 한다는 강박을 느낀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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