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해서 더 위대한 '을'들의 사실주의
그동안 일상의 소소함에 무심한 채, 거대 담론에만 가치를 부여한 건 아닐까?
돌이켜 보면 씁쓸하고 때론 치졸했던 순간에도 내게 위로를 건넸던 건, 주변인들의 사소한 생활 철학이었다.
장류진의 소설 『일의 기쁨과 슬픔』은 구조 속에서 소외받는 이들의 목소리를 담담하게 그려내며 주변을 돌아보게 했다. 이 책은 '직장 여성(잘 살겠습니다), 막막한 현실 앞의 청년(다소 낮음, 백 한 번째 이력서), 갑질에 시달리는 노동자(일의 기쁨과 슬픔)' 등 우리 주변의 수많은 '을'의 이야기다.
작가는 노동과 삶의 경계를 명확히 알고, 일의 기쁨과 슬픔을 조화시키며 자본주의 시스템을 살아가는 개인들을 무겁지 않은 시선으로 그려낸다. 이를 통해 심각하지 않은 듯 보이는 일상 속에 담긴 '평범한 사람들의 사실주의'를 포착해 낸다.
이 소설을 읽은 후의 감정이 연민일지, 웃음일지, 씁쓸함일지는 어느 인물에 감정을 이입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처음에는 맡은 바 소임을 다하고 공과 사를 명확히 구분하는 주인공 '나'의 시선에 공감하며, 매사 실수를 연발하는 '빛나 언니'를 통해 직장 내 사회적 관계와 거리를 흥미롭게 읽었다.
주인공 '나'는 ‘빛나 언니’에게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를 가르쳐주려 한다. 5만 원을 내야 5만 원을 돌려받고, 7억짜리 아파트를 받았으면 평생 그 가치만큼 희생해야 한다는 냉정한 기브 앤 테이크의 논리다.
하지만 다시 곱씹어보면 평범한 속물에 가까운 주인공보다, 그녀가 관찰하는 어리숙한 선배 '빛나'에게 더 마음이 쓰인다. 주인공의 관찰만으로는 알 수 없는 그녀의 사연이 궁금해진다. 모두에게 민폐 캐릭터로 보일지라도, 그 이면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정이 있을지 모르니까.
“모두의 예상과는 달리 언니는 꽤 오래 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나는 스물일곱이나 먹고 이런 기본적인 부동산 상식조차 모르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나는 언니의 프로필 사진을 볼 때마다 대체 왜 저렇게 하지 하고 생각했다... 나라면 내가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할 수 있는 사적인 인간이라는 거 떠올리지 못하게 할 텐데...”
(장류진, 『일의 기쁨과 슬픔』, 창비, 2019)
꿈을 좇는 삶이 어떻게 현실 부적응으로 비칠 수 있는지, 그리고 자신만의 세계가 확고한 예술가라도 결국 사회적 존재일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시대의 흐름을 따르지 못하는 순수함(혹은 무지함)이 주변 사람들을 얼마나 힘들게 할 수 있는지를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다.
“냉장고~ 장고, 장고, 장고”
“누가 음악 관두래?... 좋아하는 음악하고 앨범 내라는 거잖아.” “냉장고 송은 그냥 재미로 만든 거잖아. 내가 추구하는 음악이 아니란 말이야. 나는 제대로 된 곡으로 정규 2집 앨범 내는 게 꿈이야.”
아무 조건 없이 그냥 네가 너여서 좋다는 눈빛... 개는 생각보다 비쌌다...”
(장류진, 『일의 기쁨과 슬픔』, 창비, 2019)
-일의 기쁨과 슬픔: 을의 입장일 수밖에 없는 직장인의 비애. "굴욕은 짧지만 인생은 길다"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여전히 우리 주변에 몰상식한 고용주가 있다는 사실이 불쾌하게 다가왔다.
-나의 후쿠오카 가이드: 산뜻한 연애 이야기인 줄로만 알았다. 그 안에 숨은 '시선 폭력'을 포착하지 못한 것을 보며 나의 젠더 감수성이 아직 부족한 건 아닌지 돌아보게 되었다.
-백한 번째 이력서와 첫 번째 출근길: 짧지만 강렬한 단편. 힘든 시기를 견뎌냈을 청춘을 진심으로 응원하고 싶어졌다.
-탐페레 공항: 현실과 타협한 사람은 다시 날 수 있을까? 발밑 아득한 별에서 쏘아 올린 듯 헤엄쳐 가는 빛줄기(오로라)의 묘사가 인상 깊다.
별점:(★★★☆☆ 3.5/5점)
한 줄 추천: 보통 사람들의 평범한 이야기 속에서 미묘한 갈등을 포착하여 일상적으로 서술하는 데에도 필력이 필요하다! 분투하는 직장인들이 평안하기를 응원한다. 그리고 익숙한 행복과 나태에 저항하며 살아가는 '보통 사람'인 나 자신을, 나도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