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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가르침)’이 아닌 ‘스스로 배움’ 수업으로

김두루한(참배움연구소장)

 교사의 등급을 구별한다면


수업의 모습을 두고 조벽 교수가 다음 네 가지로 교사의 등급을 구별할 수 있다고 밝혔다.   


(1)

 A: 학생이 묻고 학생이 답한다.(붙딱지-포스트잇 등으로 서로 질문하는 학생을 도와 주는 선생님)  

B: 학생이 묻고 교사가 답한다.(우수한 학생들만 질문을 하고 교사가 답하며 토론으로까지 이어지는 경우)

C: 교사가 묻고 학생이 답한다.(학생이 예습을 해 왔거나, 질문이 좀 쉬어서 답을 찾을 만한 질문인 경우)

D: 교사가 묻고 교사가 답한다.(질문이 잘못 되거나 대답할 분위기 형성이 안 된 경우)   


(1)을 소개하며 고등학교에 근무하는 어느 ‘토론 전문가’ 교사는 자신을 F 등급이라 하였다. “질문 없이 진도만 나가니까요.” 농담 반 진담 반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는 이야기다. 질문과 소통이 거의 없는 ‘강의식 수업’이 대부분인 일반 고등학교 교사 처지에서 공감이 갔기 때문일 것이다.


배움과 질문 없는 수업을 좋은 수업이라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절로 들게 되는 물음이 따른다. 배움과 질문 없는 수업을 좋은 수업이라 할 수 있을까? 


그런데, 아예 스스로 배우는 학생을 만드는 가르치지 않는 수업이 있다. 학생이 공부하게 하려면 학생들로 하여금 스스로 묻고 답하고 앞에 나와서 설명하고 발표하는 경험을 쌓게 하는 것이다. 


학생이 교사의 자리에서 질문을 던지고 교사나 나머지 학생들이 답하는 경우의 수업이다. 이런 수업을 하는 교사를 S 등급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가르침’에 따라 학교에서 배운 것은 오늘 우리에게 무엇으로 남았는가


그동안 학교에서 배우는 것은 ‘가르침’에 따랐다. 교사에 따라서 ‘교과서’를 더욱 빨리, 쉽게, 많이 배울 수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가르침’은 이때 잘 가려서 배우도록 이끌어야 하지만 한국 사람들의 처지에서 옛일을 되새겨 보면, ‘교육’이란 이름 아래 대부분 흉내내기 수준에서  교사를 따라서 배우는데 그쳤다.


부끄럽게도 ‘제국주의 식민 통치’와 ‘계엄령’이나 ‘유신헌법’ 등을 내세워 반민주 독재를 지키고 옹호하던 때가 있었다. 이 때 ‘학교’에서 선생님들은 뜻하지 않게 억지 배움, 거짓 배움으로 이끌기도 했다.


학생들이 스스로 연구하고 정리하여 발표하는 문제 해결 능력을 길러야


 고등학교에서 막상 ‘토론’ 수업을 해 보자는 제안을 교과협의회에서 하게 되면 으레 듣는 말이 있다. 

“학생들이 머리속에 든 게 없는데 무슨 토론을 하나요?”란 말이다. “5.16과 5.18의 차이를 모르는 아이들한테 토론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모순입니다”란 반응도 있다. 


 하지만 학생들이 스스로 연구하고 정리하며 발표할 시간을 주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교사 한 사람의 열강보다 학생이 주도하는 수업은 ‘지식’을 주고받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주어진 문제를 무엇이든 스스로 풀 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는 것이다. 이런 문제 해결 능력이 바로 더 나아가는 배움의 연장으로서 어떤 과목에서든 기초를 다질 수 있는 발판이 된다. 


발견 학습이나 집단 토의, 디베이트, 모둠 활동 등이 유효한 스스로 배움의 길이 열리는 것이다. 물론 선생님은 할 일이 바뀔 것이다. 이제껏처럼 영어에 관한 ‘지식 전달’이 아니라 학생의 배움과 성장 활동을 관찰하게 될 것이다. 또 그들을 도우며 바라지(지원)하는 보람을 즐거이 누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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