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두루한(참배움연구소장)
배움은 배움의 알맹이인 ‘앎(지식)’이 몸과 마음에 배어드는 과정이다. ‘세 살 버릇 여든 간다’의 ‘버릇’도 ‘배우다’와 마찬가지로 ‘배다’에 뿌리를 둔 것이고. 배우면 절로 그렇게 생각하고 움직이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밥을 먹어 몸을 지키듯 나날이 ‘앎(지식)’을 익히고 배움에 힘써야 한다. 마음을 잘 다루며 사람답게 살 수 있으니까.
하지만 오늘날 현실은 어떠한가? 대한민국의 미래가 흔들리고 있다. 학교가 무너지고 있기 때문이다. 학생들이 학교에서 행복한 배움을 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묻고 있다. "우리들의 학교엔 진정 배움이 있습니까? " 하고.
고등학교에서 수업하는 교실을 보라! 아무도 좋아하지 않고 재미없다는 학생들의 표정들이 아닌가? 날마다 베풀어지는 ‘교육(가르침)’은 학교에서 겉돌고 있다. ‘수능' 인강과 '수능특강'과 '수능 완성’의 문제 풀이에 코박고 따라가는 고3 학생들은 터널 속에서 힘들 뿐이다.
이처럼 학생들이 학교에서 행복한 배움을 맛보기 어려운 까닭은 무엇일까? 식민과 독재의 틀 안에서 억지로 강요당한 ‘따라 배움’의 연장 때문일까? 실천하지 않아도 이론만으로 넘어가는 ‘거짓 배움’ 탓일까? 함께 힘을 모으기보다는 남을 짓밟듯 시험을 치르는 ‘경쟁 배움’ 탓일까?
무엇보다 ‘강의를 통한 배움’ 탓이라 여긴다. 선생님이 칠판 앞에 서서 교과서에 있는 여러 정보들을 설명해주고 학생들은 선생님이 중요하다고 (시험에 나온다고) 하는 부분을 표시해 놓고 필기하는 배움 말이다. 마치 상관의 지휘 아래 똑 같은 총 사용법에 따라 총알을 장전하고 목표물을 조준하여 방아쇠를 당기는 행동을 단체로 해야 하듯.
이처럼 ‘강의식’은 최고의 전문가들이 세워 둔 방향에 따라 함께 배운다는 장점이 있지만 학교 정기고사인 중간,기말고사 ‘시험’으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하다. 두 달에 한 번씩 진도에 쫒기며 학생을 위한 시험이 아니라 시험을 위한 학생과 교사가 되어.
일찍이 ‘콩쯔’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배움에 뜻을 둔 때가 열다섯 살 때라 했다.( 吾十有五而志于學) 콩쯔나름으로 겪은 일로 해서 배움의 뜻을 세웠으리라 여겨진다. 요즘도 중고등학교 즈음에 진로를 탐색하고 어느 정도 분야를 정하기 마련인 것처럼.
하지만 '대학입시'를 준비하는 오늘날의 처지에서 대한민국 배움이(학생)들이 진리탐구에 나서지 못하는 것은 안타깝기 그지 없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마찬가지로 '점수'에 신경 쓰면서 쓸데 없는 '겨루기(경쟁)'로 정작 길러야 할 이해력이나 표현력은 제대로 갈고 닦지 못한다.
‘뜻이 있으면 길이 있다’에서 보듯이 뜻은 사람을 끌고 가는 힘인 셈이다. 오늘 배움이(학생)들의 마음은 어떠한가? 굳센 ‘뜻’은 여간해서 흔들리거나 꺾이지도 않는다.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나'를 위한 배움에서 나아가 '남'을 위한 배움에 뜻을 두길 바란다. '분열'과 '갈등'에 얽매이지 않고 서로 아우르고 어울러 새 길을 여는 '젊은 그들'을 기다린다. 그들이 우리 사회를 바꾸어내는가의 여부는 오늘 우리 사회가 그들이 생각하는 힘을 기르도록 얼마나 참배움을 지원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라도 학생들이 참배움으로 스스로 묻고 함께 답을 찾으며 재미를 느껴야 하지 않겠는가? 학생들이 저마다 스스로 물은 것을 두고 다른 학생들과 함께 답을 찾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다. 남을 짓밟듯 '경쟁'하거나 억지로 강요받고 이론만으로 넘어가는 ‘거짓배움’에서 벗어나야 하겠다. 모두가 행복한 배움으로 희망을 찾아야 하겠다.
이제라도 교사들부터 나서자. 참배움의 본보기가 되어. 학생들이 ‘토론이나 발표를 통한 배움’을 누려야 하고 학생들이 배움을 누리도록 도우자. 스스로 생각거리(배움 주제)를 정하여 자신의 의견에 반대 의견을 내는 학생과 토론하며 가치관을 세워나갈 수 있도록. 배움을 탐구하고 토론 수업을 하며 토론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는 지휘관은 학생 자신이니까. 스스로 배움의 목표를 설정하고, 여러 배움의 방식들을 시도해보며 그것을 공유하면서 자신의 배움을 성취하는 ‘자유 배움’의 권리를 누리고 ‘생각하는 참배움’을 하도록 도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