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줄을 서게 되었나

최고의 공정이 정말 ‘줄세움(서열)’인가.


아침 7시 10분. 밥그릇은 김이 오르는데, 아이의 손은 휴대전화 화면을 더 오래 붙잡고 있습니다. 급식표가 아니라 학원 시간표, 오늘 할 문제 수, ‘이번 주 모의고사’ 알림이 먼저 뜹니다. “엄마, 오늘은 몇 시간 해야 돼?” 아이는 스스로 묻는 듯하지만, 사실은 이미 누군가가 정해 둔 답을 확인하는 말입니다. 이 말이 학교 앞 버스정류장에서, 학부모 단톡방에서, 교무실 문틈에서 반복되는 걸 우리는 너무 익숙하게 봐 왔습니다.


대한민국에서 공정은 오랫동안 ‘같은 잣대’였습니다. 같은 날, 같은 시험, 같은 채점. 그러면 공정하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 잣대는 언제부터 ‘같은 기회’가 아니라 ‘같은 줄’이 되었을까요. 줄세움은 원래 경쟁이 아니라 생존의 기술이었습니다. 나라가 가난하고, 일자리가 좁고, 대학 문이 높을수록 한 줄로 서는 일이 합리처럼 보였습니다. 부모는 불안을 관리해야 했고, 학교는 그 불안을 성적표로 번역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어느새 3대에 걸쳐 같은 질문을 물려주었습니다. “몇 점이야?” “몇 등급이야?” “어느 대학이야?”


문제는 그 합리가 너무 오래 굳었다는 데 있습니다. 줄세움은 배움을 돕는 도구가 아니라 배움을 지휘하는 체제가 됐습니다. 아이는 “왜 배우는가”보다 “몇 점짜리인가”를 먼저 묻고, 교사는 질문을 키우기보다 범위를 줄입니다. 성적은 노력의 증거가 아니라 존재의 값처럼 취급됩니다. 그러니 줄에서 밀려난 아이는 자신을 포기하고, 줄 안의 아이도 끝없는 비교에 지칩니다. 공정이라는 이름으로 만든 줄이, 사실은 우리 모두를 더 불공정하게 만드는 셈입니다. 출발선이 다르면 같은 잣대는 곧 다른 고통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공정을 다시 묻고 싶습니다. 최고의 공정이 정말 ‘서열’인가. 공정은 1등을 뽑는 기술이 아니라, 누구나 배움의 바닥에 닿게 하는 약속이어야 합니다. 줄세움이 아니라 나세움. 남의 기준에 나를 맞추는 훈련이 아니라, 내 안의 기준을 세우는 배움. 이 전환이 ‘이상’이 아니라 ‘생존’인 이유는 여기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정답을 빨리 찾는 시대에 들어섰고, 앞으로는 정답이 아니라 물음과 해냄이 사람의 가치를 결정할 테니까요. 이제 공정은 “같이 서열”이 아니라 “같이 살아남기”로 다시 정의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뜻배음: “몇 점이야?” 대신 “요즘 네가 붙든 물음이 뭐야?”를 한 번만 묻기.
다음 질문: 당신에게 공정은 ‘같은 잣대’였나요, ‘살아나게 하는 약속’이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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